미국에서 학생비자로 학교를 졸업하면, OPT(Optional Practical Training) 신분을 받을 수 있다.
딱 1년간 전공과 관련된 곳에서 인턴을 할 수 있는 기회. 전공과 관련있는 업종에서 경험을 할 수 있고, 정규직으로의 전환도 회사에 제안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1년이 끝나면? 고용주가 비자 스폰을 해주거나, 합법적인 신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분이라는 벽은 꽤 높았다.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도 했다. 하지만, 배우자의 뜻도 있었고, 결국 미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러기 위해선 OPT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파라마운트, 유니버셜 스튜디오, 디즈니 등등 수십 개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비자 스폰이 필요한 외국인을 굳이 고용할 이유가 없는 거다. 같은 조건이라면, 당연히 미국 시민권자를 뽑는다. 현실은 냉정했다.
미국 유명 대학교 혹은 대학원을 졸업한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도 ‘신분’ 때문이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 있는 한국 기업에 취직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 회사는 한국말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유학생은 비자가 필요하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남을 수 있지만, 대신 그 회사에서 묶여서 일해야 한다. 비자 스폰을 해준다는 의미는 비자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그 회사에서 일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싫어도 그만둘 수 없다는 이야기다.
선택이 아니라, 생존.
비자가 해결된다 해도 고민은 남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인 2세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자란 그들에게는 영어도, 문화도 익숙한 반면, 나는 그들만큼 자연스럽게 녹아들 자신이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 무렵, 한인 2세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 FOB이구나!”
처음엔 이 말이 무슨 뜻이 몰랐다. ‘퐙? 지금 나한테 욕하는건가?’ 하고 단어를 찾아봤다. ‘Fresh Off the Boat’의 줄임말. 우리나라 말로는 ‘배에서 갓 내린’, 즉 이민자 티 팍팍 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 순간 기분이 씁쓸해졌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남의 땅에 와 이런 소리를 들어야한단 말인가. 그 친구는 그냥 별 뜻 없이 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이 말은 “너 영어도 어색하고, 문화에도 익숙하지 않아 겉돌고 있는 거 다 알아!” 라는 의미였다. 2세들의 눈에는 FOB은 티가 난다고 한다.
한인 2세 친구들의 경험담을 빌리자면(이 친구들도 이제 30대이니 지금 현실은 또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다.) 자신이 고등학생 때, 한인 2세와 FOB은 물과 기름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2세들의 시선으로 보면, 미국에 왔는데 한국어만 쓰면서 한국인 친구들하고만 어울려 다니는 이 그룹이 이해가 갈 리 없다. 본의 아니게 그 그룹과는 거리를 두거나 자칫 ‘인종차별’로 보일 수 있는 상황까지 생긴다고 했다. 같은 인종에게 당하는 인종차별이라니. 그 친구들에게 나는 철저한 이방인으로 보일 뿐인걸까.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프레쉬 오프 더 보트’는 지난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방영된 미국의 시트콤 제목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는 실존 인물 에디 황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대만계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워싱턴 DC의 차이나 타운에서 가구점의 세일즈맨으로 일하던 루이스 황(영화 ‘인터뷰’에서 김정은 역을 맡아 한국에서 잘 알려진 배우 ‘랜달 박’ 분).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가족과 함께 올랜도로 넘어가 웨스턴 풍 레스토랑을 연다. 워싱턴의 차이나타운을 벗어나 처음으로 다른 인종의 이웃들과 지내게 되며 겪는 해프닝, 미국에서 나고 자란 동양계 이민 2세대가 학교에서 이방인 취급을 당하며 겪는 적응기, 이민 1세대와 2세대 간의 가치관 차이로 발생하는 의견 불일치 등 90년대 이민자의 삶을 유쾌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그려낸 이 드라마는, 이곳 엘에이 한인사회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었다. 이 드라마를 보며 깨달았다. 내가 FOB이라는 말에 기분이 나빴던 것도, 결국 내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남의 나라에서 ‘FOB’으로 살고 있는 나의 인생이여. 그렇다면 나는 유학생일까, 이민자일까? 이곳에 정착하려고 온 이민자는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이곳에 남게 됐다. 미국에 잠깐 들린 방문객이라기엔 여정이 너무 길어지고 있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넘어오는 이민자 카테고리에 속하기엔, 의도가 불분명하다. 어쩌다보니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신세.
그렇다면, FOB이 되어버린 이민 1세대, 소수인종으로서 나는 앞으로 이곳에서 뭘 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아니면 안 될’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하는 일. 그리고, 철저하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그것만이, 이곳에서 내 자리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