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장항준 감독의 "라이터를 켜라"
명절 특선으로 가끔 보았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 백수 허봉구(김승우)는 엉뚱하게 서울역까지 와버린 그의 수중에 남은 거라곤 전 재산을 털어서 산 일회용 라이터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그는 그만 그 라이터마저도 두고 나와버렸다.
황급히 다시 돌아왔지만 라이터는 이미 건달보스 양철곤 수중에 넘어가 있었다.
봉구는 정중하게 라이터를 돌려달라고 했지만 철곤은 그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무시해버렸다.
기분이 나빠진 봉구는 철곤을 쫓아 부산으로 출발하는 열차에 올라타게 된다.
영화 끝까지 집요하게 라이터 하나 때문에 조폭들과 끝장을 보는 '참신한?' 이 영화에서 나는
기차를 탈 땐 평범한 '백수'였으나, 내릴 땐 '영웅' 이 되는 주인공을 보면서,
근로자로 태어났지만
근로자로 죽을 순 없지 않은가.
생각했다.
웬 피콜로 더듬이 빠는 소리인가 할 텐데,
매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 올라타는 사람은 수십만 아니 수백만이 될 터인데,
이들은 날 때부터 근로자이고 싶었을까?
아니, 절대 아닐 거다.
'라이터를 켜라'의 승객들 모두 '조폭(차승원)'의 횡포에 맞서고 싶다는 '생각'은 했을 거다.
그들 모두 처음부터 핍박당하는 '승객'의 역할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들의 강력한 폭력 앞에 쭈굴이 모드가 되는 '본성'에 순응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승객 중에 단 한 명(김승우)만이 자신 소유의 '라이터'를 되찾기 위해 폭력에 대항한다.
시장 = 전쟁터
매일 지옥철에 몸을 싣고 꿈도 싣고 직장을 오고 가며,
고이고이 헌납한 우리의 '젊음(=TIME)'을
대부분은 그저 소비라는 이름으로 흘려보낸다.
지하철의 수많은 인파 중 아주 소수가 (투자자)
말도 안 되는 폭력이 난무하는 전쟁터
자본 시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갈아만든 소중한 '자본'을
던져 넣는다.
두려움 = 본성
시장의 변동성(폭력)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두려움' 즉, '본성'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머리로는 알고 있다.'(아니 그걸 누가 몰라?)
그런데 정작 '본성'을 거슬러 대항하는 이는 아주 소수다.
그래서 수익을 내는 개미가 소수인 이유다.
물론 '본성'을 이겨내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런데 왜 '자주' 우리는 본성에 굴복하는 것일까.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불확실성을 견디고 나면 찾아오는 온전한 '성과'를 얻은 경험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다.
시간 → 다시 시간
투자를 하는 '목적'은 자산 증식을 통해 궁극적으로 '시간'을 얻기 위해서라고 나는 정의를 내렸다.
1) 무형의 시간 → 2) 지식 → 3) 자본 → 4) 자산 → 5) 무형의 시간
1) 시간과 5)의 시간은 동일한 '길이'이가 될 테지만.
1)의 시간이 2) ~ 4)를 거치는 동안, 가치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1)의 한 시간이 투여되어 시간이 흘러 5)에서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동일한 한 시간이지만,
한 사이클을 도는 동안 나는 자산으로 내 미래의 '자유시간'을 응축 시켜 놓은 것이다.
다른 말로 처음 투입한 100만 원(1시간)이 나중엔 200만 원(2시간), 300백만 원(3시간)
또는 그 이상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인데,
나는 경험적으로 이게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결론
영화의 주인공(김승우)이 자신이 가진 전부였던 '라이터'를 다시 찾아오기까지 너무나 힘든 투쟁을 이어간다.
그에게 라이터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 또는 그 이상의 '모든 것' 이었다.
정작 우리는 본래 가져야 했던 '자유 시간'의 '일부'라도 다시 되찾기 위해 허봉구 처럼 처절했던 적이 있던가?
라이터를 켜라감독장항준출연김승우, 차승원개봉2002. 0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