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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스페인, 너 내 동료가 돼라

챕터 3. 여정의 시작에서 주의할 것들

by 노마드 써니

<챕터 3 미리보기>

- 여정의 시작에서 주의할 것들로는

- 불안감을 잘 관리해라.

- 스스로의 에너지 레벨을 잘 관찰하고 그에 맞는 (자신을 돌보는) 선택을 해라. 그 선택을 반복해서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라.

- 내 동료를 알아보는 법은 내 몸이 알고 있다.

-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마음가짐을 가져라.

- 자유를 감각을 통해 몸으로 느낄 기회를 잡아라. (=맨몸으로 물에 뛰어들 수 있을 때는 그냥 해라)

- 갈 때 가더라도 투표는 해야한다.


***


아니 그냥 그렇게 디지털노마드로 살기로 했다고? 그렇게 쉽게? 하고 물어본다면 네, 뭐 그렇습니다,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사실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에는 큰 것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는 게 내 지론이다. 별 시덥잖은 작은 결심으로도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찾아올 수 있다는 것. 이 작은 게 뭐라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보다 그 작은 일을 진짜 선택해서 구현해 내는 것이 실제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걸 아니까. 물론 이미 온라인으로 하고 있는 일이 있던 게 컸다.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던 대학동문이 온라인으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는 바로 나를 추천했다. 아르바이트할 사람을 쓰지 말고 날 쓰라고. 그렇게 최저시급 8천원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연차가 차면서 사이도 가까워지고 업무량도 늘고 시급도 올라서 디지털노마드 생활을 하기에 충분한 돈은 아니었지만 다른 일을 하면서는 생활이 충분히 되겠다 싶었다. 때마침 한국으로 돌아와서 온라인 원서 독서모임을 운영하는 회사에서 모임진행자가 되었으니, 온라인으로 하는 일을 추가도 했겠다, 이제 괜찮아졌지. 자, 그럼 이제 디지털노마드들이 모여있는 코리빙들 중에서 어디로 갈까?


하베아의 모습

내가 인터넷을 통해 찾은 곳 중 첫 코리빙으로 낙점을 받은 곳은 스페인의 작은 해변마을 하베아(Javea)에 위치한 썬앤코(Sun and Co.)였다.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리뷰들을 보면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곳이라 눈에 띄었는데 무슨 상도 많이 받았더라. 그래, 시작할거면 인정받은 곳에서 시작해야 안전하지. 아무 이유없이 이렇게 긍정적으로 많이 언급되지는 않을거야. 그래도 돈받고 쓴 리뷰일수도 있으니 더 찾아보자.


더 찾아봤고, 마음의 결단을 내려 한 달을 예약했다. 항공사 신용카드를 발급받기 시작했다. 마일리지를 쌓았다. 마일리지로 비행기표를 샀다. 출근하던 사무실에 관둔다고 말씀도 드렸다.


“앞으로 두 달간 제 자리 채울 분 알아보시고 혹시라도 그 분이 일찍 시작하게 되면 제가 인수인계는 빠르게 할 수 있어요. 최대한으로 일할 수 있는 날짜는 5월 23일까지 입니다.”


내 자리를 채울 분은 구해지지 않았고 결국 전달했던 날짜 끝까지 일을 하고 나왔다.


떠나더라도 투표는 하고가는 나 어떤데. 라운지에서 먹으면서 일하는 나 어떤데!

내가 도착한 최종 장소의 스페인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빛이었다. 그 부드러운 빛에 닿기까지가 쉽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국에서 아침에 투표를 하고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아침 5시 50분에 주민센터에 가서 줄을 서서 투표를 할 때까지만 해도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빛을 떠나왔는데 런던 도착해서 며칠을 보내고 다시 런던에서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의 알리칸테에서 내려서 나는 문제에 봉착했다. 이 때부터 이미 시작이었다. 나는 항상 운송 관련해서는 드라마를 몰고 다니는 재주가 있다. 물론 그걸 스스로 인지한 것은 아주 늦은 후의 얘기다.


스페인 가기전에 영국에서 공항갈 때도 드라마가 찬란했다 아주. 나의 교통편 드라마만 다 써도 책 한 권 나올듯 와씨


알리칸테에서 하베아까지 어떻게 갈까 고민하다가 저렴한 라이드 쉐어 서비스인 블라블라카에서 나는 하베아를 가는 사람을 찾아서 예약을 해놨었다. 근데 아뿔싸. 나는 너무 스페인을 만만하고 쉽게 봤던 거지. 공항에서 약속장소인 기차역에 버스를 타고 20kg가 넘어가는 여행가방을 질질 끌면서 왔는데 나는 운전자 양반을 찾지 못했고, 스페인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했다. (이건 지금도 그런 것 같...) 난 정말 몰랐소, 그네들이 영어를 이리 못할줄은. 결국 약속시간이 지나가고, 나는 핸드폰으로 ‘지금 역에 있는데 너를 못찾고 있다’고 메세지를 보내다가 핸드폰의 배터리가 다되어 꺼져버리는 상황을 맞이했다. 안일했지. 보조배터리도 작은 가방이 아니라 큰 가방에 넣었어서 열고 꺼내기도 힘들고.


결국 핸드폰을 다시 켰을 때는 운전자는 나에게 욕을 한바가지 하고 떠난 상황이었고, 나는 울퉁불퉁한 스페인의 길을 여행가방을 덜덜덜덜 밀면서 (길이 분명 정돈된 도로인데 평평하지가 않아) 땀을 삐질삐질도 아니고 뻘뻘, 아이고 나 죽소~ 하면서 흘리는 쪼매난 동양여자애가 되어 버스 정류소를 향해 걸어가야만 했다. 진짜 나를 짠하게 바라보는 눈길들 ... 그래요, 내가 좀 불쌍해 보였죠?


버스 여정은 나쁘지 않았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결국엔 난 도착했으니까. 아휴 얼른 짐 풀고 누우면 좋겠네. 코리빙 대문 앞에서 벨을 누르고 기다렸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썬앤코에서 인턴을 하고 있던 유스라.

“어서와~ 오느라 고생했지 더운데 얼른 들어와!”


돌건물이어서 그런가, 햇볕에서 그늘로 옮겨가서 그런가, 들어서자마자 온도가 낮아진다. 내 땀이 식을 수 있다. 숨을 크게 내쉰다. 나를 반기는 웃는 얼굴을 보니 나도 미소가 퍼진다. 여기가 한 달 동안 내 집이 될 곳. 누구를 만나게 될까. 두근두근.


썬앤코에서 나는 4인실을 선택했는데, 한국을 떠나면서 세 가지 일을 하다가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으로 일의 양을 줄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수입도 줄었어서, 돈을 아껴써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예약도 가장 저렴한 방으로 했었다. 유스라는 방으로 나를 데려갔고, 내 침대 위에는 와인 한 병과 환영인사가 적인 카드가 있었다.


“일단 가방은 놔두고 집 소개부터 할게.”


1층에는 모두가 공유하는 부엌, 부엌에거 통유리창으로 연결된 야외 파티오, 큰 식탁테이블과 쇼파가 있어서 다같이 영화를 보기도 하고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실내 공간과 코워킹 공간이 있었다.


“코워킹은 여기말고 2분 걸어서 나오는 건물에도 있으니까 편한대로 일하면 돼. 카페에서 일하는 애들도 꽤 있고.”


2층에는 방이 있고 3층에는 방과 공유화장실, 샤워실이 있었다. 넓다. 정말 큰 건물이긴 하네. 쇼파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와 인사를 했다.


“안녕, 아이린이야.”

“안녕, 난 써니야. 반가워~”


포옹을 하는데 느낌이 왔다. 가슴이 따뜻해진다. 좋은 친구가 되겠구나.


아이린과 나

2017년에 전남친과 헤어지고 난 후로 나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의 긴 시간을 뒤로 하고 한국에 잠깐 돌아왔었는데, 겨울에서 여름으로의 이동으로 인한 큰 온도차, 호주 영주권 좌절, 당장 보이지 않는 미래의 길, 내가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남자친구와의 이별이 모두 한 데 겹쳐 마음이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당시에 가슴 통증이 심했는데, 양쪽 가슴 사이의 뼈가 있는 부분이 정말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기만 해도 너무 아파서, 마치 누가 끝이 뭉툭한 못을 박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말 그대로 가슴이 아파서 많이 울었었다. 그 시간에 대한 회복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크게 배운 것 중 하나는 내 몸에 대한 것이었다.


내 몸은 끊임없이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데 나는 내 몸에 생각보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가슴 통증이 내 안에 쌓여서 막혀버린 감정들의 찌꺼기가 내 안에 남아있다는 걸 말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후로 내가 치유를 거치면서 내 몸이 나에게 이야기하는 바를 전보다 잘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은 가장 큰 자산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내 몸이 스페인에 도착한 첫 날 나한테 속삭인다. 아이린, 저 친구 너에게 좋은 사람이야.


아이린과는 그렇게 빠르게 친해졌다. 당시 썬앤코에서 머무는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유색인종이었던 우리 둘이 친해진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디지털노마드는 아무래도 백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는데, 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모든 백인들을 싸잡아 일반화하는 것은 아닌데도, 많은 백인들은 소수감수성이 옅고, 차별에 무디다. 본인들이 차별을 받는 일이 현저히 적다보니 인지도 잘 못하고, 무감각하게 상대방을 상처주는 일도 부지기수다. 아이린과 나는 이런 점에서 서로를 잘 이해했다. 우리의 섬세함은 결이 같았다.


Fogueres de Sant Joan 축제의 밤. 불을 뛰어넘다가 친구가 자빠졌다


썬앤코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하는 일이 참 다양했다. 나는 대부분 개발자겠거니 했는데, 남아공에서 회계사를 하는 아이린 외에도 아마존 사업을 하는 미국 친구들, 마케터, 회사원, 작가 등 내가 예상하지 않았던 직업들이 많았다. 국가만 다양한게 아니라 직업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니 얼마나 재밌어. 성장배경 다르지, 생각하는 것도 다르지, 일하는 시간대도 다르지, 디지털노마드 생활을 한 기간도 달라서 누구는 이미 이렇게 산지 한 참 된 사람도 있고 초짜도 있고 다 너무 제각각이라 같이 무언가를 하면 항상 이야기가 두꺼워지고 풍성해지는게 하루하루가 너무 재밌었다.


각자가 하루하루를 잘 채울 수 있게 썬앤코는 코리빙으로서 사람들을 어떻게 구조적으로 도와줄까? 썬앤코는 매주 월요일에 패밀리 미팅을 했다. 숙소 건물과 3분 거리로 떨어져있는 코워킹 건물에서 월요일 저녁에 모여서 한 주간을 채울 이벤트 등을 함께 계획한다. 사교적인 성격을 띄는 패밀리 디너는 매주 목요일 저녁에 하는데, ‘이번 주는 누가 이끌어 볼래?’ 하면 누군가가 손을 든다. 메뉴가 정해지면 필요한 재료들을 유리창에 적고 각자 사고싶은 재료들을 정해서 자기 이름을 그 옆에 적는다. 그렇게 이끄는 사람 두 명, 패밀리 디너에 참여하는 나머지 인원들은 이끄는 사람들의 지휘를 따라 재료를 손질하고 칼질을 하고 지지고 볶고 테이블을 세팅하는 등의 일을 해서 다 함께 맛있는 한 끼를 만들어낸다.


하베아 하면 바다지!


이건 참 모든 코리빙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의 삶에 있어서 아름답다, 인간적이고 사람의 맛을 느끼게 한다고 내가 미소짓게 되는 부분이다. 바로 ‘나눔’, 코리빙의 핵심이지 않을까 한다.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서, 누가 나에게 돈을 쥐어주는 것도 아니고, 이력서에 한 줄 적을 것도 아닌데, 시간을 들여 고심해 메뉴를 고르고 재료들을 체크해서 공유하고, 다른 친구들이 요리 과정에서 무슨 역할을 할지 하나하나 알려주고, 요리가 완성되어 다 한자리에 앉으면 이 요리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공유하고 다같이 음식을 즐기고 웃음이 터지는 시간. 나누려고 했더니 더 큰 선물을 받게 되는 것이 코리빙의 원리다. 같이 사니까. 이 원리가 너무 중요하다.


패밀리 디너 비빔밥 버젼

패밀리 디너 외에도 패밀리 미팅 동안에는 여러가지 이벤트들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결정된 건들이 일주일을 채우게 된다. 마스터마인드는 고민이 있는 사람이 안건을 제안한다.


‘나 이런 고민이 있는데, 새로운 관점이 필요해. 다들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데 어때?’


내가 있는 동안에 했던 마스터마인드 때는 한 친구가 ‘어떻게하면 지치지 않고 디지털노마드 라이프스타일을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를 안건으로 내놓았다. 너무나 즐거운 코리빙 생활인데, 상대적으로 지루할 수 있는 일상생활에서 나와 여행지에서 일상을 살기로 했더니 이 일상이 피곤해져버리는 현상이 고민이 되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잠에 들기까지 항상 집을 가득 채운 친구들이 있고, 항상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게 되고, 무언가 재밌는 일이 자꾸 일어나니까 내가 에너지가 많지 않아도 참여를 하고 싶게 되는 상황. 아 나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쉬고 싶은데 또 안가면 재밌는 걸 놓쳐서 아쉽고 FOMO, fear of missing out 이라고 한다만, 그렇다고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고 모든 활동에 다 참여하게 되면 번아웃이 씨게 온다. 아무것도 안하고 동굴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여행 번아웃, 디지털노마드 번아웃은 생각보다 흔하다. 여행 번아웃을 처음 내가 겪었던 것은 호주에서였는데,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친한 친구들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번아웃이 와버렸다. 모든 것이 시큰둥, 자기소개를 하는 것도 귀찮고. 디지털노마드 번아웃도 에너지가 고갈된다는 점에서 결은 비슷하다.


결론적으로는 나의 에너지에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걸 느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보는 ‘선택’을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에너지가 영 없고 쉼이 필요한 순간이라면 아무리 큰 유혹이 있더라도 나를 돌보는 쉼을 선택하고 그런 선택들을 쌓아가면서 내 스스로에게 나는 나를 돌보는 사람이라는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것. 추가로 한 여행지에서 다른 여행지로 너무 빠르게 이동하지 않고 충분히 지내면서 스스로를 보채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거 정말이지 생각보다 어렵다. 놓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선택의 기반이 되는 경우는 정말 많다. 디지털노마드로 살려면, 디지털노마드로 잘 살려면, 불안감을 잘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썬앤코는 1주일이 최소 예약기간이었는데 1주일을 지내면서 ‘이왕이면’ 그 지역에서 할 수 있는 것들도 하고, ‘이왕이면’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과 네트워킹도 하고, 시간이 짧게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이왕이면’ 병에 걸려서 나의 에너지를 극단적으로 소진해가면서 일정들을 무리하게 소화하려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1주일이 아니라 두 달을 한 곳에서 머물게 되면 오늘이 아니더라도 남은 시간 동안이 충분하니까 불안감이 줄어들고 조금 더 여유있는 생활이 가능하다.


하품하며 일하는 나 어떤데


내가 지낸 6월의 하베아는 조금 더 특별한데, 한달 동안 동네 전체에서 축제가 펼쳐진다. Fogueres de Sant Joan 는 알리칸테 지역 전체에서 행해지는 전통적인 축제행사이다. 매일 밤 열두시부터 야외콘서트가 새벽 네시, 주말에는 심지어 새벽 6시까지 있고, 아침 8시에서 10시 사이에는 일어나서 일하러 가라고 폭죽을 터뜨리는가 하면 6월 말에는 동네 곳곳에 불을 피워놓고 불 위를 뛰어넘는 것까지. 나는 사실 6월에 이런 축제가 있는 것을 모르고 갔는데, 사람이 치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 알았으면 여기를 이 때에 가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이미 와버렸으니 어쩌겠나. 어쨌든 나는 최대한 한 달간 축제와는 상관없이 잘 살기 위해 노력했다. 친구들과 같이 자정에 춤추러 나가도 나는 새벽 한 시에 들어와서 잠을 청하는 방식으로.


하베아에서의 나의 일과를 살펴보면,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일을 시작한다. 내가 일어나서 1층으로 내려오면 거의 항상 아무도 없었는데, 그렇게 조용한 아침에 일을 시작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그렇게 일을 하고 있으면 하나 둘 하루를 시작하는 친구들이 나타나서 아침인사를 한다. 일을 어느 정도 일단락을 지으면 나는 계란후라이를 해먹든가 전날 남겨놓은 저녁식사를 반찬통에 담아놓은 것을 꺼내먹고 배를 채운다. 그러면 이제 슬금슬금 나는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할 수가 있다. 비치타올, 물병, 책, 자외선차단제, 선글라스를 챙기고 느릿느릿 해변가로 걸어간다.


간단하게 해먹던 아침밥. 지금은 이정도도 안한다 허허


썬앤코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 10-15분, 걸어서는 한 30분 정도면 해변에 도착할 수가 있다. 특이하게 여기는 모래해변이 아니고 자갈밭인데, 처음에는 울퉁불퉁하니 이게 뭐야 했던게 점점 좋아졌다. 지금도 나는 모래해변보다 자갈해변이 훨씬 좋다고 말한다. 자갈해변은 모래가 옷이나 수영복, 피부에 달라붙지도 않고 깔끔하다. 스페인 해변이라서 좋은 점도 있는데, 상의탈의가 가능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도 있겠다. 상체에 아무것도 안 입은 여성들이 정말 정말 정말 많다. 여기는 그런가 보다, 하고 처음에는 말았는데 보다보니 나도 벗고싶어졌다.


내가 누드비치의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호주에 있을 때 친구들끼리 다같이 사람들이 오지 않는 해변가에 우리만의 누드비치를 즐겨보자고 해서 나를 포함 다섯명의 친구가 시도를 해봤었다. 위아래를 모두다 벗고 누워서 음악을 듣고, 대화를 하고, 춤을 추고, 책 읽으며 맥주도 한 모금 마시고 물에도 뛰어들었다. 수영복이 어차피 우리 몸을 가리는 부분이 크지 않은데, 그걸 벗어제낀다고 큰 차이가 있냐? 그런데 그게 있다. 아무 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태초의 모습으로 너와 내가 서로를 보는데, 거기에는 서로를 그대로의 본연의 모습으로 보는 데에서 오는 자유함이 있다. 꾸미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자유롭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도 자유롭다. 물에 들어갔을 때 몸의 모든 부분이 물과 직접 닿는다. 내가 물이고 물이 내가 된다.


스페인의 해변에서 내 가슴도 그렇게 자유로웠다. 누구에게나 있는 가슴 뭐가 그리 특별할소냐.


하베아에서의 한 달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인턴인 유스라가 인턴 기간을 마치고 벨기에로 돌아가기 전에 작별파티로 썬앤코 전체가 해변에서의 저녁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아이린은 테이블이 될만한 넓고 낮은 나무상자들을 길거리에서 보고 주인과 얘기를 하더니 그걸 얻어왔다. 동네에 있는 가게들을 돌아다녀서 페인트를 구해다 마당에서 페인트칠을 했다. 식탁보로 쓸 천들을 챙기고 꽃병, 꽃, 음식들을 간단하게 준비해서 우리는 평소에 자주가든 자갈해변이 아닌 동네 반대편의 모래해변으로 향했다.


해변에서의 저녁식사


촛불을 켜놓고 모여앉아 유스라의 인턴기간 완료를 축하하고, 선물을 주고, 서로 껴안고 웃으며 축배를 들었다. 해가 다 지고 보름달이 떠올랐을 때 누군가가 외쳤다. 바다가 우리를 불러.


그렇게 우리는 모두 옷을 벗어제끼고 물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밤인데도 미지근한 물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환히 비치는 보름달 빛을 받으며 물에 비친 달빛을 놀리며 우리는 한참을 수영을 하다가 나왔다. 물 속에서 온몸으로 흐느적거리는데 그걸 내 피부 전체가 느끼는, 그 촉각의 섬세함이 극대화되는 순간은 정말이지 특별하다. 그 순간을 누군가와 함께 느끼고 함께 웃을 수 있는 것 또한 특별하다. 가득 찬 하나의 마음으로 흘렀다.


그렇게 보름달을 보고 우리는 또 다음 날 일을 했다. 디지털노마드니까. 어쩔 수 없지! 먹고 살려면.


바다가 우리를 부르던 날의 보름달


나는 스페인에서 참 좋은 동료들을 만났다. 나의 소중한 첫 디지털노마드 동료들. 썬앤코는 7월, 8월 두 달 간은 코리빙이 아닌 호스텔로 운영을 하기 때문에 모두가 6월 말에는 체크아웃을 해야했다.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다음 도착지도 코리빙. 스페인이기는 하지만 알리칸테 지역과는 기후도 문화도 다른 갈리시아 지역의 작은 동네 안세우(Anceu)에 있는 안세우코리빙이 나의 다음 목적지였다. 여기에서는 7월부터 8월 중순까지 6주 정도를 보낼 터였다. 썬앤코 직원 중 한 명의 추천을 받아 선택한 곳이었는데 나는 그렇게 알게 됐다. 아, 코리빙을 어디를 갈지 알려면 나를 아는 사람이 추천을 해주는 데를 가면 되겠구나.


내가 두 팔을 벌려 껴안아도 둘레의 반의 반도 못 감아드는 두꺼운 나무들로 둘러싸인 천국. 안세우.









*** 챕터 4 예고

2022년 7월 스페인 - 느리게 빠른 시간


*** 챕터 3에 다 못 쓴 에피소드

- 패밀리 디너 비빔밥으로 집이 뒤집어진 날,

- 동네 뒷산 올랐다가 산염소 별명을 얻은 일,

- 옆 동네(Denia) 선셋크루즈 타러 가기,

- 매주 수요일 마켓 (실험: 츄로스로 아침 혈당을 높이면 어떻게 되나),

- 옆 동네(Altea) 데이트립,

- 페스티벌 마지막 날 - 화관 만들기, 불 뛰어넘기, 응급처치를 받은 자빠진 내 친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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