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 avenue Emile zola, 5번째 층 왼쪽 문, 75015
11시 40분 의문스러운 h의 방문이 급작스럽게, 난데없이, 당황스럽게, 어찌할 바를 모르게 고요했던 s의 밤을 두들긴다. 마치 탈의실에서 적당히 알던 누군가를 마주쳐 어정쩡하게 남은 속옷을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는 그런 기분으로 s는 문 밖의 h의 얼굴을 마주했다.
익숙한 복도의 꺼져가는 불빛 아래 낯설어야 마땅한 h의 얼굴이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것이 낯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간에, 이 공간에 h가 있을 논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 h는 s 친구의 동기 중 하나로, 파리에서 둘의 공통분모라고는 s의 친구가 짐을 싸던 날 집 아래 카페에서 마신 커피 한잔이 전부였다. 즉,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다 한들 문제될 게 없는 정도의 사이라는 것이다. h에게는 당황스러워하는 s에게 둘러댈 이유 같아 보이는 변명이 절실한 듯 했다. h는 오래되어 쓸모없어진 가구의 옹이처럼 가닥가닥 메마른 결대로 갈라지는 목소리로, 봇 따리 상 마냥 자신의 자잘한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내 펼쳐놓기 시작했다. 단 하나, 손가락 마디가 하얘지도록 꽉 움켜진 공포의 근원, 그 한 가지만 빼고. h는 낯설었지만 h의 감정은 낯설지 않았다. 주인의 튼튼한 구속으로부터 버려진 길든 짐승의 눈, 먼지처럼 공기 중을 둥둥 떠다니던 이름 모를 불안들, 분노들이 뒤엉켜 그 동공위에 새파랗게 공포로 얼어버린 눈이 왠지 모르게 나를 두렵게 했다. 세상을 똑똑하게 살아가기 위해선, 마주하는 어떤 결과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찾는 일이 필요한 듯 보였지만 가끔씩은 원인을 몰라야 하는 결과들이 이런 식으로 가는 길 위에 툭툭 내던져지곤 했다. s는 으레 꺼내야하는 평범한 질문들조차 꺼낼 수 없었다. s 역시 주머니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자신의 불안을 슬그머니 어루만지고 있을 뿐.
s는 조용히 냉장고를 연다. 냉장고에 마지막 남은 냉동딸기를 접시 위에 담아낸다. 문득 날이 밝으면 일요일이라 집 앞의 마트가 문을 열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걱정이 스치기는 하지만 지금은 이 이상의 것이 생각나지 않으니 별 도리가 없다. s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h는 말이 없다. 말 없는 h를 바라보는 s에게 그동안 h의 주변을 맴돌던 근원지 없는 목소리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각자가 가진 은밀한 장면들을 보호해주는 넉넉한 창문과 창문 사이의 거리를 획득할 수 없는 이 작은 도시에서 입과 입을 몇 번을 거쳤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민담들이 h의 주변에는 항상 만연했다. h는 프랑스인을 3번이나 사귀고 유학생을 사귄다더라, 어느 유학생은 h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더라, h를 시내 어느 클럽에서 봤다더라, 더라, 더라, 더라.... 늘 항상 더라로 끝나는 목소리들이 s를 비롯하여 h를 몰랐었고, 또 모르는 여러 귀들에 앉아있는 듯 했다. s는 자신도 모르는 새 h의 공포를 더듬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s가 애써 그 목소리들을 내보내는 동안 시간은 점점 녹아내리는 딸기 위로 그 공포를 지그시 짓누르고 있다. s는 최대한 그 공포를 모른척 해주기 위해 움켜쥐고 있었던 자신의 왼손을 펼친다.
“저 시계 보이지? 나는 침대에 누울 때마다 저 시계가 머리 위로 떨어져서 다음 날 아침에 못 일어나는 거 아닐까 싶어서 침대에 눕는 게 무서워.”
“에이 사람 죽는 거 쉬운 일 아니야, 사람 잘 안 죽어”
“응 그것도 무서운데, 여기는 나 혼자잖아, 아무도 없잖아. 아무리 누구랑 밥도 먹고 술도 먹고 같이 놀러 다녀도 결국에 내 곁에는 아무도 없을 거라는 걸 알아서 그게 무서워. 내가 죽어서 내 몸이 썩어 가는데, 그렇게 내가 사라져가는데, 아무도 날 발견 못해 줄까봐. 그럼 내년이나 돼야 발견될 텐데, 그 시간이 얼마나 아득할까, 그게 너무 무서워. 다들 과연 얼마나 슬퍼할까. 아무도 없는 벌판에 혼자 남아서 아무도 듣지 못하는걸 알면서도 제발 들어달라고 목 터지게 소리만 지르는 기분이야”
“그럼 내가 오늘처럼 집에 올게. 왠지 죽을 거 같은 기분이 들면, 편지통에 열쇠 넣어놔”
녹아내린 냉동딸기에서 빨간 액체가 흘러나와 접시 위에 지저분하게 번진다. 낮은 접시의 경사로로 빨간 액체가 흘러나와 접시를 테이블 보를 붉게 물들인다. 보통 s는 집에 찾아온 손님을 위해 냉동과일을 내놓을 땐, 이런 식으로 접시가 더러워지는 게 보기 싫어 항상 해동을 한 뒤 키친타올로 먼저 물기를 빼고 접시 위에 올려놓곤 했었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무언가가 최고로 지저분한 방식으로 녹아내리는 것을 본다. 누군가가 자신의 일상 안으로 손을 내밀 때, 내민 손을 믿음직하게 잡아주기 위해선 오른 손을 숨김없이 펼쳐 보여줘야 했지만, 간절함으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쥔 왼손은 주머니 속에 꽁꽁 숨겨두고 끝까지 보여주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s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것이라는 걸 s는 긴 시간이 지나서 비로소 깨달았다. 그걸 깨달은 이후의 s는 더더욱 외로워졌지만 최소한의 방어막을 확보했다는 안도감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접시위에 녹아내린 딸기처럼 s의 왼손이 녹아내리고 있다. 방이 덥다. s의 왼손이 녹아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h의 얼굴 위로 새파랗게 질린 공포가 서서히 녹아 얼굴 위에 송골송골 맺힌다. h의 공포가 녹아내리고 있다. 가파르게 들썩 거리는 h의 어깨를 보며, '가끔은 이런식으로 무너져내릴 기울기라는 걸 알면서도 계산없이, 온전히 그 기울기에 몸을 기대고 싶은 예외의 상황들도 찾아오나보다'라고 생각한다.
h가 소리내어 운다. 뒤틀린 뼈 마디 마다 새겨졌을 h의 불안이, 공포가, 지독한 외로움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음 소리에 섞여 들어간다. h는 어쩌면 지금 자기가 닥친 상황에 대한 평범한 위로의 말들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히 같이 누군가를 욕해주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s는 지그시 h의 공포를 자신이 가진 공포의 시선으로 차분하게 눌러주고 있을 뿐이다. 각자의 공포는 서로 얼굴도 이름도 그 내용도 몰랐지만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애도의 형식을 가지는 것들도 간혹 있기 마련일거라고, s는 생각했다. 위로의 형식을 갖춘 말들은 끝내 전하지 못했다. 결국 그 날 밤 현실적으로 중요했던 것들을 s는 단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날 밤 이후 s는 h를 다시는 볼 기회가 없었다. s는 여전히 그날 무슨 이유로 h가 자신의 집에 찾아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물론 그날 밤 이후에도 s는 h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로 h의 불황을 듣곤 했다. 그날 밤 끝내 알지 못했던 것들도 대충 유추는 가능할 정도로 전해들은 불황은 디테일했다. s는 뉴스채널을 돌리듯, 들려오는 h의 불황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렇게 독이 든 음식을 담은 수저처럼 s의 머리 속 h는 검게 물들어갔다. 이제와 s는 무엇이 진실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려한다. 다만 한 가지는 중요했다. 그 날 h가 집을 나서며 남기고 간 수식 없는 맨 얼굴의 한마디.
'너라서 참 다행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