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드 골 공항 터미널 2
J에게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하루 먼저 파리로 올라와 호텔에서 자겠다는 연락이 왔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j에게 새로운 장래희망이 생겼기 때문에 그 직종의 사람들이 자주 머무는 호텔에서 하루정도는 자보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 사람들처럼 그 호텔에서 머무르며 그 사람들이 자주 호텔로 배달시킨다는 초밥 집의 초밥을 시켜먹는 걸 해보자 했다. ‘~처럼’은 s와 j가 오랜 시간 좋아했던 일종의 놀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침 7시부터 일어나 카페 레두마고에서 사르트르‘처럼’ 그가 시킨 메뉴를 그대로 시켜먹은 적도 있었고, 한 나절을 소르본 앞 만화가게 벤치에 앉아 읽을 수도 없는 신문을 들고만 앉아있기도 했다. 졸업초과학기도, 토익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시간, 공상이 머무는 그 시간동안만은 그저 낭만에, 노스탈지에, 마음을 찌르는 소설이나 시 한 장면에 푹 젖어있을 수 있는 ‘~처럼’의 시간. 역시 아무리 팔아도 돈 한 푼 나오지 못할 학문을 전공생들다운 놀이였다.
오후 늦게 시작된 s와 j의 ‘~처럼’ 계획은 틀어지기는 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완벽했다. s와 j는 ‘그 사람들처럼’의 초밥 대신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산 초밥을 샀다. 결국 그 초밥 맛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들이 산 초밥 역시 그 초밥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귀여운 인형들과 선물들, 케이크, 과자들을 잔뜩 사와서 침대 위에 예쁘게 올려놓고 뿌듯할 만큼 예쁜 사진도 찍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던 j는 슬퍼하며 술은 한 병 이상 가지고 입국하면 세금을 150프로나 내야하니 다 마셔버려야 한다며 가져온 술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들만의 파티가 끝난 뒤 s와 j는 각자의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우니 수많은 말들이 흘러나와 두 침대 사이의 벌어진 틈새를 매웠다. 쏟아 내버린 말들도 있었고, 새어나오지 못하게 틀어막은 말들도 있었고 틀어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누수 되어 나오는 그런 말들도 있었다. 한 사람에게 다른 한 사람이 부재했던 그 시간 동안 혀 밑에 축적되어 왔던 수많은 말들이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 말들을 장작으로 밀어 넣으며 1분 1초가 아까운 그 마지막 밤은 더 검게 타들어갔다. 왜 붙잡아두고 싶은 순간들은 이리도 빨리 타들어가는 것일까, 그 연기는 왜 그토록 매캐하고 지독하게 오랫동안 눈가에 남는 걸까. 뒤돌아 누운 j의 뒷모습 위로 떠오르는 마지막 밤을 잡아먹는 여명 빛을 바라보며 s는 시간이 헤어진 전 애인보다 더 매정하다고 생각한다.
정윤아,
한국으로 돌아가면 뭐부터 할 거야 내년 이맘때는 뭐하고 있을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지금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때도 여전히 바보가 된 기분 속에 살고 있을까 그때도 이렇게 깜깜 하려나 그때쯤이면 그래도 최소 한 발자국 앞날정도는 보면서 살 수 있을까 너 결혼할 거니 결혼 안하면 좋겠다 앞으로도 이렇게 매일 같이 놀게 결혼하면 나랑 놀아줄 시간이 없을 거 같아서 싫다 오늘처럼 이렇게 재밌는 시간들은 2배만 느리게 가면 좋겠다 오늘 이시간이 안개처럼 아득하게 눈앞에 번지는 그런 때가 되면 다시 우리가 이 호텔 같은 침대에 누워서 이렇게 이런저런 얘기할 기회가 생길까 아니지 그때는 더 좋은 호텔에서 자자 우리 예전에 봤던 르뫼리스 호텔 제일 비싼 방에 자보자 우리 돈 많이 벌자 그 방에 체크인하면 숨 쉬는 것도 아깝고 자는 것도 아까워서 잠도 안 오겠다 그치 그 전날 하루 종일 자둬야겠는데 크크크크 우리 앞으로는 좀 덜 불안하고, 덜 연약하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가 목숨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있잖아, 낭만, 문학, 삶의 의미 같은 그런 것들은 이제 실수로 잃어버린 척 버리고 어른이 되자
작은 사건사고들을 군것질거리처럼 계속 달고 다니던 둘답게 공항에서 출국하는 과정 또한 순탄치는 않았다.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잘못 탔고, 캐리어의 바퀴가 부셔졌으며, 수하물이 과중되어 캐리어 안의 짐들을 꺼내야했다. s는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들을 양손이 가득 차고 넘치도록 받았다. 출국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평소랑 다름없는 시시한 수다들이 이어졌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도 모르고 밤을 새워 떠들곤 했던 그 얘기들이 갑자기 왜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을 입 안 가득 물은 것 마냥 목구멍에 턱턱 걸려 자꾸 토막토막 부서지는 걸까. 이별에 있어서 s는 덜 슬픈 사람이 되기 위해 항상 떠나는 사람이 되겠다 다짐했지만, 생각보다 떠나는 일보단 보내야하는 일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떠나보내는 일을 정기 행사처럼 치뤄내며 s는 그럴듯한 보내기 예행 연습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보내는 일은 이토록 입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건지 그 또한 의문이다. 마지막 인사를 나눈 j가 출국장 문을 통과한다. 저 문은 문 밖의 사람에겐 항상 출구로 남아있지만 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입구가 된다. j는 이제 새로 찾은 방의 입구로 들어간다. j가 열 새로운 방에는 최소한 이름이라도 있겠지, 나는 그저 시간이 흐름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남들이 고르고 남은 나머지’의 방 앞에 던져질 텐데. 문득 s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던 j가 새삼스럽게 부러워진다.
헤어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둘은 미래에 대한 공상들로 애써 이 마침표를 마침표가 아닌 따옴표일 뿐이라고 서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s는 알았다. j 역시도 알고 있을 것이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의 시간, 그것이 심지어 먼 미래에 대한 것이었을 지라도, 이제는 그 모든 걸 과거의 것으로 마침표를 찍고 장을 넘겨야 한다는 것을. s는 j가 이제 저 에스컬레이터를 지나 출국심사대를 통과하면 우리의 시간들을 떠나 어른처럼 어른이 하는 일들을 하고, 어른처럼 돈을 벌어서 스스로 먹고 사는 일들을 차곡차곡 쌓아 벽을 세우고 더 견고한 새방을 지을 것이라는 걸 안다. 어쩌다 태풍이 몰아쳐 그 방에 작고 큰 균열들이 생기면 그 틈새로 떨어지는 과거의 흔적들을 보고 ‘아 그랬었지’라고 생각하며 그 틈 위에 더 견고한 시멘트를 바르게 될 것이라는 걸 안다.
s에게 j는 여름으로 남아있다. s는 j를 그칠 줄 모르는 굵은 장맛비 속에서 처음 만났고 몇 년 동안 지속되는 그 우기 동안 함께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떠돌아다녔다. 어떤 것도 알 수 없어서 한 없이 아득했던 시간들이었다. 누군가 언제 비가 그치는지 알려주었으면, 그게 아니라면 어디서 비를 피해야하는지 라도 알려주었으면,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좋으니 다른 누군가가 다가와 뭐래도 알려주기를 간절하게 바랬다. 간절함으로 인해 좁아진 눈으로 들어선 길들은 대부분 잘못된 길들이었기에 몇 번은 넘어지고 일어서는 걸 반복해야했다. s가 같은 곳에서 몇 번씩 넘어지고 있을 때 j는 그저 s의 절망 옆에 가만히 서서 s를 기다려주곤 했다. j의 그 눈빛을 s는 지금도 기억한다. 싸울 일도 많았다. 원래 타인과 부딪치는 마찰에서 s는 되도록 선 밖의 입장을 고수하려 하는 사람이었지만 j와는 그렇지 못했다. 너무도 작고 시시한 일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서운하고 뭐가 그렇게 미웠는지 지금도 s는 알 수 없다. 흘러가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그 장마를 걷어냈고 지금은 햇빛이 머리 바로 위에서 뜨겁고 아프게 내리쬐는 한 여름. 살갗이 벗겨져 나갈 만큼 뜨거운 한여름 오후의 햇빛 속에서 s는 눈을 감고 j와 함께 지나간 우기를 생각한다. 눈을 감고 빛이 닫히자 그토록 춥고 힘들었던 장마 속의 장면들이 뜨거운 빛의 잔상 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느 날 좋은 오후 수업이 끝난 s와 j는 한 손에 아이스크림 크레페를 들고 거리를 걸어간다. 무슨 얘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둘은 다리 한 가운데에 멈춰 서서 미친 듯이 웃는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손 위로 줄줄 흐르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모르는 사람들의 눈빛도 중요하지 않고, 지금 웃고 있는 이 소재가 이토록 웃을만한 소재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넋이 나가고 진이 빠지도록 웃고만 있는 것이다. 그러다 j는 ‘너무 웃어서 아까 먹은 점심이 체한 것 같다’며 아픈 표정으로 배를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s는 그 모습조차 웃겨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j는 내일 또 보자며 손을 흔들고 지하철 개찰구로 사라지고 홀로 그 시간 속에 남은 s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는 지나가버린 그 장마는
이렇게,
눈이 멀도록 찬란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