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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Apr 28. 2019

13번째 증언 / 윤지오

 한창 히어로 영화의 인기가 대단하니, 영웅 영화 서사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그러한 영화들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면은 무엇보다 주인공이 스스로에 대해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배경과 자신의 능력을 인식하고 영웅으로서의 당위성과 책임을 스스로에게 지우면서 영웅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들이다. 그 과정을 만드는 것들은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선천적 장점이 큰 기능을 할 수도 있겠지만 단점 또는 콤플렉스 또한 그에 못지않게 영웅으로서의 배경을 만들며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트라우마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트라우마는 보통 이중 삼중으로 쌓이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죄책감은 주인공의 영웅으로의 변신에 결정적 방아쇠 역할을 한다. 이렇게 보면 영웅은 그 단어의 풍채보다도 훨씬 부족함이 많아 보이는 약한 인간으로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웅의 대척점에는, 자신의 존재로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자신의 부재로 주인공을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가도록 하기도 하는 악당들이 있다. 주인공의 트라우마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주인공의 존재 때문에 자신들의 부당하고 악랄한 삶이나 계획이 타격을 입을 사람들, 가장 골치 아프게는 그냥 영웅의 존재와 가치를 부정하기 위한 존재인 이 악당들은, 주인공의 신체를 직접 위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중에게 영웅에 대한 불신을 심음으로써 주인공을 위기에 처하게 한다.

 그 방법들을 소개하자면, 가장 쉽게는 "영웅 행세를 하는 저 놈은 사실 나쁜 놈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 처음부터 쓰는 방법이지만 처음부터 잘 먹히는 방법은 아니며 그렇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전략이다. 대중이 쉽게 속지 않으면, 악당들은 교묘해진다. "저 영웅의 '무기'가 사실은 일반 대중들에게도 위험할 수 있다"와 같은 작전으로 소위 물타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악당들은 어울리지 않게 법이나 정의를 들먹이며 "영웅이 무기를 불법적으로 사용한다"와 같은 주장을 하기도 한다. 영웅의 힘을 약하게 하려는 것이다. 최후의 단계에서는 "저 영웅은 너희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대중들을 동요하게 한다. 아니면 더 악랄하게는 이렇게 말이다, "저 영웅은 영웅 행세를 하면서도 평범한 삶 또한 영위하려 한다. 모든 것을 내던지지 않으려 하고, 영웅으로 불리면서도 너희 대중처럼 평범한 삶 또한 가지려는 욕심쟁이이며 게다가 영웅 행세를 통해서 이득을 얻고 있다. 영웅이라면 필히 마술적이며 미스터리한 존재여야 하는데, 저 영웅은 너희들이 살아가는 데 돈이 필요한 것처럼 똑같이 돈을 필요로 하는 자격미달의 영웅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웅과 악당의 대립이 전개될수록, 악당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당의 이러한 전략들이 결국에는 영웅을 둘러싸는 전선이 다양하게 형성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웅 영화 시리즈가 계속되는 원리이기도 하다.


 어쨌든 영웅은 이래저래 보통 사람이라면 감당하기 힘든 고난들을 버텨내면서 영웅이 되어가고 또 그로 인해 더 많은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요즘의 현실에서 이러한 영웅의 역할을 떠맡게 된 인물이 있다면 누가 가장 적절할까? 그 주인공은 주저 없이 윤지오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는 '증언'이라는 무기와 그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용기'와 '끈질김'이라는 능력을 지녔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비롯해 어릴 적부터 쌓여온 폭력의 목격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의 활동이 단순히 한 사건만을 겨냥한 것만이 아니라 부당함과 폭력에 관련된 우리 사회 전체의 분위기 자체를 노리는 어려운 과제로서의 운명을 짊어진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윤지오의 법적 효력을 가진 증언 말고 카톡 대화 내용을 들먹이며 그 안의 부분들을 편집하여 의혹이랍시고 문제 삼으면서 일관성이나 도덕성을 운운하는 최근의 양상은, 가히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아니, 왜 우리가 도대체 경검 조사 혹은 법정에서의 증언 말고 개인의 사적인 카톡 대화까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인가? 윤지오가 몰카를 공유했나 아니면 테러 모의라도 했나? 이러한 치사하고 악랄한 행태들은 윤지오를 둘러싼 전선을 마구잡이식으로 형성하게 하여 그를 지치게 만드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와 같은 대중이 알아야 할 것은, 그러한 논란들 속 주제들이 전혀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허구의 전선이기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전투를 담은 기사들을 보이콧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집중력 있고 탄탄한 서사의 훌륭한 영웅 시리즈를 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인 것은, 윤지오라는 인간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트라우마에 의해 "갑자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시기를 견뎌내고 결국에는 "내 잘못이 아니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함으로써 죄책감과 죄를 구분할 수 있게 된 그가 쓴 책 <13번째 증언>을 읽으면서, 10년이 넘게 이 싸움이 이어지며 적어도 악당들 몇몇을 특정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을 알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우리가 영화를 보기 전에도 악당의 이름과 생김새를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저렇게 악당들의 정체를 가늠하는 것도 어려웠던 것은, 현실과 영화 속 악당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악당들이 화려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시각화되어 그 모습이 위협적이어야 하는 반면, 현실에서는 악당들이 시각적으로 현전되지 않기 위해 기를 쓴다는 점이 그것이다. 현실에서는 악당의 모습이 비가시적일수록, 피해자들의 고통은 더 곪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의 수 또한 더 늘어난다. 그러니까 현실에서의 윤지오와 같은 영웅들은 피해자였고 지금도 피해자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내 말은, 윤지오는 영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그는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싸우고 있다. 영웅에 대한 가면 벗기기 놀이를 그만두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의 살가죽까지 벗기고야 말 것이다. 그때, 어둠 속에서 미소 짓는 것은 범죄자들 뿐이며 다음 피해자는 내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피해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피해자가 아직 아닌 것은 그저 운이 좋아서이다. 반면, 영웅들은 자신이 당한 피해보다 더 큰 두려움을 감수하면서 우리를 대신해 싸운다. 아직 피해자가 아닌 대중으로서,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면, 그냥 묵묵히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을 수는 있다. 조금 더 나아가면, 평소에 사람들과 이 얘기를 나누면서 중요한 것은 증언일 뿐이라는 말만이라도 한다면, 영웅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영웅들의 가면을 굳이 벗기려고 하지 않아도, 그들은 영웅뿐만 아니라 피해자 혹은 증인이라는 가면을 벗고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다. 그런 날을 앞두고 '이젠 가망이 없어'라고 말하지 않고 '이제 최종 단계야'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희망하고 응원한다. 최소한 그런 장면을 우리가 함께 실현하는 것이 악당을 죽이진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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