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그리고 언제나 관객
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감독의 <사수>를 인상 깊게 봤기 때문인지, 이번 인디다큐페스티발을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 같다는 새삼스러운 생각에 집중하게 되었다. 하기야, 기록한다는 것은 무언가가 사라지기 전에 기록한다는 것이거나 어느새 사라졌을지도 모를 무언가를 (재)발견한다는 것일 테니 나는 너무나 새롭지 않은 당연한 소리를 하려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많은 다큐멘터리 속 인물들이, 그리고 그들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스트들이 지켜내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나? 혹은 그들의 그러한 지켜내고자 하는 행위는 그 대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무언가를 지켜내고자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애초에 그 대상이 자신 안에 속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당연한 것들을 굳이 자신의 것이라고, 자기에 속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당연히 그것은 그것들이 위협받고 있거나 훼손당하거나 박탈당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자로서의 권리, 트라우마 이전의 정신 건강, 혹은 그 트라우마 자체, 마을, 집, 가게, 지나간 세월, 후회, 우울, 감정,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정체성, 살고 싶은 마음, 자신만의 시간 등. 빼앗기거나 사라질 그것들을 끝끝내 놓지 않으려는 안간힘인 동시에, 그것의 불가능함을 체험하는 무기력이자, 바로 그러한 무기력에 대한 이해 또는 또 한 번의 새로운 도전. 이제는, 혹은 애초에 그들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빼앗기거나 사라진 것들을, 그들은 자신의 것이라고 자꾸 선언한다. 이제는 그들 외부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가리키면서, 그것들을 향해, "저것은 나의 것이다" 혹은 "저것이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시선의 구조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은 어쩌면 정말로 그것들이 더 이상 그들의 내부에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확인하는 것에 그치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의 다큐멘터리 작업 행위는 사실은 그러한 내부/외부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극복하는 것이며, 따라서 시선의 일방향성을 역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스트들에게 사실 어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그들 자신을 바로 그렇게 구성하고자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스트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그리고 언제나 관객이고, 그럼으로써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상당히 구성적이고 확장적인 행위임을 직접 증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시대의 다큐멘터리들을 필히 관람해야 할 의무가 있고, 인디다큐페스티발 상영작들을 본다면 그러한 의무를 스스로에게 기꺼이 지우게 될 것이라고 감히 확신하는 바이다. 이렇게 말하면 야속하지만, 다음 인디다큐페스티발 2020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힘들고 부조리한 필사적인 시간을 계속 혹은 새로이 견뎌내야만 한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바라보는 대상과 내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말은 이런 역발상을 상상하게 해 준다. 이런 영화들과 이런 영화제는 관객들로 하여금 다큐멘터리스트가 될 수 있다고,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보다 멋진 성과가 있을까? 더 많은 것을 우리가 함께 지켜내고자 할 수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