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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Nov 14. 2018

러브 스토리 / 크리에이티브 VaQi / 이경성

나경민 성수연 우범진 / 2018.11.13 / Space111

 이경성 연출의 작품이 좋은 것은, 연극이 시작하면 관객들이 바로 그 연극을 위한 연습 첫날에 스텝, 배우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경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 연극의 완성을 위한 고민에 같이 참여하도록 만드는 데에 주저가 없다. 이 말은 소위 '관객 참여형' 연극을 뜻하지 않는다. 이경성은 관객을 무대로 떠밀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는 연극은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연극은 막이 오르기 전이나 막이 내린 후에 아주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도록 하는 것이 이경성 연극의 힘이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는 무대 위에 픽션이 아니라 현실을 올려놓는다. 물질적으로는 도큐먼트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낫겠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정말로 전시되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가 보다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그저 도큐먼트인 것이 아니라 이 연극의 창작자'들'의 고민이라는 또 다른 현실이다.


 전작 <워킹 홀리데이>로부터 이어지는 고민일 수도 있겠다. 세 배우는 개성공단을 둘러싼,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2016년 2월 10일 개성공단 가동 중단이 일어날 때까지의 상황에 대한 각자의 상상을 전개한다. 그들은 개성공단 직원들의 인터뷰나 구글 어스 등 실재적 사료들을 참고하기도 하면서, 그것들의 한계 - 예를 들면 확대할수록 더 커지기만 하는 구글 어스 화면의 픽셀들pixels - 에 맞닥뜨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 한계들에 힘입어서, 그곳에서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북한 인물들에 대한 소설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워킹 홀리데이>가, 배우들이 직접 걸었던 길을, 그리고 걸으면서 했던 고민들을, 관객들로 하여금 같이 걷게 하고 같이 고민하도록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 길이 우리가 실제적으로는 갈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그 길을 걷는 것은 분단의 현실을 증명하는 것과도 같았다. <러브 스토리>에서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여기서는, 어떻게 보자면 '이제는' 갈 수 없는, 그리고 요즘의 희망적인 상황에 기대어 보자면 '아직은' 갈 수 없는, 개성공단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다루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배우들이 개성공단에 '갈 수 없고' 그곳의 북한 사람들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이 연극은 그곳의 인물들을 '상상할 수' 있다. 상상하기는 이 연극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자 목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이 연극의 준비가 시작되기 전을 묻고 싶어 진다. 왜 우리가 개성공단의 북한 사람들을 상상해야 하는 것일까? 배우들은 각자가 사랑하게 되고야 마는 이북의 인물들을 상상하기 위해, 자신의 고정관념과 또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자신의 좋았던 경험 그리고 억압의 경험 등을 적극적으로 인용하거나 차용한다. 그들은 은밀히 자신이 창조해내는 캐릭터에 자신과의 유사함을 부여하고 그들을 휴전선 북쪽에 위치시킨다. 그러한 배우들의 소설 쓰기의 자세는 남쪽의 현실이기도 할 것이다. '국뽕 테스트' 또한 분단 현실과 국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되묻는 역할을 한다. 어쨌든 이 세 명의 배우들은 우리가 북한과 그리고 북한 사람들에게 가까워져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 헌법 상에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한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남한과 북한이 같은 한민족이라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분단되었기 때문에? 기대되는 경제적 이득 때문에? 이산가족을 위해서?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답은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한반도에 사는 이상, 피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지점에 대해 이 연극이 조금 더 집요했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연극은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져 놓고 마지막에 답도 던져주는 연극이라기보다는, 관객들이 해봐야만 하는 질문이 있음을, 그리고 관객들이 스스로 질문을 하고 고민할 수 있음을 설득하는 연극일 것이다. 자신이 제기한 질문의 해답에 대해서 책임을 지거나 혹은 무책임한 연극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연극은 관객에게 기꺼이 책임을 선사한다. '이 연극은 왜 시작되었을까?' 바로 그렇게 물을 때, 연극은 막이 내린 후에도 계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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