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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Oct 25. 2019

자화상: 47km 마을의 창 / 장멩치

Self Portrait: Window in 47KM

Self Portrait: Window in 47KM / Zhang Mengqi


 영화는 어떤 눈 내린 낡고 낮은 건물을 비추면서 시작한다. 그 건물 외벽에는 중국어로 "오직 OO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라는 슬로건이 겨우 알아볼 수 있게 쓰여 있다. 건물의 문 두 짝에 쓰여 있었을 OO이라는 단어만큼은 거의 완전히 지워진 채로 말이다. 프레임 밖에서 이 건물과 슬로건에 대한 기억에 관해 감독과 대화를 나누던 한 소녀가, 이내 프레임 인하여 건물 쪽으로 다가가 카메라를 향해 선다. 영화의 감독 장멩치가 그 소녀에게 질문을 건넨다. "무슨 -주의ism가 중국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중국이 구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소녀는 가령 이런 답을 내놓는다. "애국주의?" 그러면 감독은 되묻는다. "애국주의라는 것이 뭔데?" 소녀는 대답한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 문답은 계속된다. "왜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데?"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는 나라를 지켜야만 하니까요." "그러면 전쟁이 없을 때에는?" (여기 적은 질문과 대답들은 글쓴이의 기억에만 의존한 것이므로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음) ... 문답은 이런 식으로 계속되다가 결국에 소녀는 긴 침묵에 다다른다. 그 긴 침묵의 시간은 소녀가 생각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관객도 생각하는 시간이다. 감독은 질문을 조금 바꿔보기로 한다. "슬로건에서 '중국' 대신에 여기 '47KM 마을'로 단어를 바꾼다면, 이 마을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소녀는 비교적 빠르고 명쾌히 대답한다. "사람들이요." 왜 사람이냐는 질문에, 소녀는 이 마을엔 젊은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가느라 사람들이 적고, 마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단 사람들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사회주의'였을 슬로건 속 'OO주의'라는 단어 대신, 이 소녀와 감독은 더 적절하고 좋은 단어를 찾은 것만 같다.

 이 훌륭한 원 테이크 프롤로그가 끝나고, 영화는 크게 두 축으로 진행된다. 한쪽에서, 감독은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방에 앉아 있는 어떤 할아버지를 보여주면서 그와의 인터뷰를 관객에게 들려준다. 할아버지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가 자신을 팔았던 이야기, 팔려간 새 부모로부터 또다시 다른 곳으로 팔려간 기구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 그리고 자신의 당 활동에 대한 이야기들과 함께 가난했던 자신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구술한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 감독은 프롤로그의 그 소녀와 함께 마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초상화를 그리러 다닌다. 소녀가 집집을 다니며 난로나 장작불 옆에서 그 집의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의 그림을 그려주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그 그림을 직접 보거나 혹은 좋지 않은 시력 때문에 소녀에게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추위 속에서 웃음을 짓는다. 마오쩌둥의 초상화 말고 자신의 초상화를 갖게 된 것은 그들에게 아마도 처음이었을까? 어쨌든 이 두 개의 큰 축의 장면들은 한동안 계속 교차 반복되는데, 그러다가 후반부에 이 소녀와 감독은 초상화를 스케치북이 아니라 다른 곳에 그리기 시작한다. 그곳은 바로,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살고 있는 그 집의 외벽이다. 그들은 큰 벽에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프롤로그 속 건물의 외벽에 있던 거의 지워진 낡은 슬로건을, 자신들이 프롤로그 후반부에 도달한 어떤 결론, 즉 "오직 사람들만이 47KM 마을을 구할 수 있다"라는 결론을 연상시키는, 마을 사람들의 초상화로 대체한다.


 소녀가 초상화를 그리는 일련의 장면들 속에서, 나에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어느 할머니가 소녀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내 검은 신발을 빨간 신발로 바꿔버렸네." 소녀는 그저 멋쩍은 듯 웃는다. 그리고 다른 장면에서, 소녀는 감독에게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에 대해 조언을 구한다. 감독은 "너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라고 말한다. 소녀는 "나는 사실적으로 그리고 싶다"라고 말한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왜냐하면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던 소녀는 어떤 할머니의 신발 색을 칙칙한 검은색에서 밝고 선명한 빨간색으로 바꿔 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장면에서, 이 소녀는 자신의 모순적인 그림 철학에 대해 답을 하는 것만 같다. 또 다른 할머니의 집에서, 소녀는 자신이 그리는 그림 속 색들을 대부분 밝은 색으로 그려 넣고 있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밝은 색들로 활력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소녀가 아마도 의도하지는 않았을 그 맥락들을 이어보니, 내가 느낀 모순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되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소녀에게 있어서,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란 대상을 활력 있게 그린다는 것이 아닐까? 라고 말이다. 어둡고 칙칙한 집들이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 즉 사람들에게는 활력이 없을 수 없는 것일 테고, 소녀는 바로 그러한 활력을 그림으로 역설하듯 표현해낸 것은 아닐까? 라고 말이다.

 영화는 아주 큰 규모는 아닌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밤하늘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며 끝난다. 어둠 속에서 소소하지만 밝은 빛들이 빛난다. 감독은 이 인구 부족의 마을에 아직 사람들이, 활력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창으로서의 그림-영화를 그려내고자 한 것 아닐까? 이 마을을 다룬 <자화상: 47km 마을의 OO> 시리즈가 이 영화로 벌써 여덟 번째라고 하니, 그 일련의 작업들이 경이롭게 느껴짐과 동시에 궁금하고 모두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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