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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Aug 28. 2019

우리집 / 윤가은

The House of Us / Yoon Ga-eun

 초등학교 고학년의 하나는 아침을 차리고 있다. 엄마와 아빠는 아침부터 싸우고 있고, 그 광경을 피하는 대신 수저를 식탁에 놓으면서 엄마와 아빠를 주도면밀하게 살피는 듯 눈치 보는 듯하는 하나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동시에 어떤 종류의 대담함과 용기도 있다. 하나의 표정에 놓인 그 공존이 이 영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점점 알게 될 것이었다.

 방학이 시작되고, 부모님의 불화를 해결시키는 것이 방학 숙제로 주어진 마냥 하나는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기 위해 고민한다. 어릴 적 가족여행을 통해 부모님의 사이가 다시 좋아졌고 모두가 행복했었던 경험을 근거로 하나는 이번 방학에 가족여행을 반드시 성사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 하나는 우연히 유미, 유진 자매를 알게 되는데, 자매의 부모님은 멀리서 일을 하느라 집에 없는 날이 많아 그들의 집에서 자주 놀게 된다. 그러던 중 유미네 집이 또 이사를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는 유미네 집까지 자신이 지키겠다는 다소 무리한 다짐을 하게 된다. 하나, 유미, 유진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행동들을 통해 자신들의 가정과 집을 지키려는 다소 귀엽지만 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을 행보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무겁고 바꾸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는 것만 같아 보인다. 부모의 이혼 계획을 몰래 알게 된 하나는 어렵사리 성사되었던 가족여행 당일날 유미네 집으로 가고, 이사를 가지 않기 위해서는 당장 오늘 연락이 되어야 하는데 연락을 받지 않는 유미네 부모님을 직접 찾으러 가자고 유미와 유진에게 제안한다. 하지만 도중에 그들은 길을 잃고, 서로를 탓하고 공격하며 싸우기까지 한다. 폐박스들로 함께 만든 그들만의 예쁜 집을 발로 밟아 망가뜨린 그들은, 다음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언젠가는 어떻게든 이사를 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처럼 보이는 유미는 하나에게 자신들이 이사를 가더라도 하나가 자신들의 언니로서 변치 않을 것인지를 하나에게 묻고, 하나는 자신이 계속 그들의 언니로 남을 것임을 약속한다. 자신을 찾으러 다니느라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하나는 식탁을 차린다. 가족들이 돌아와 하나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나무라듯 묻지만, 하나는 밥을 먹자고 할 뿐이다. 이제야 드디어, 온 가족이 같은 식탁 앞에 앉아 밥을 먹게 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하나가 자신의 부모님 혹은 어른들을 이해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왜 그렇게 화가 많을 수밖에 없는지 혹은 부부 관계가 어떤 것인지 혹은 어른으로서 책임을 짊어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짜증이 난다는 것과 화를 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떠한 책임감을 감당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과정이 분명 이 영화 안에는 포함되어 있다. 또 다른 면에서, 이 영화는 하나가 어른의 역할을 대신 점유하려고 애쓰는 모습 혹은 애쓸 수밖에 없는 배경을 담는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유미와 유진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그들을 이끌어서 자신의 결정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이나 그 과정 속에서 가끔은 훈계하기도 하며 최연장자로서의 역할을 연기해내려는 모습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가 자신의 생존 방법 혹은 자아실현 혹은 자기 방어의 방법으로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 예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하나의 모습과 관련하여 하나의 엄마를 관찰한다면, 하나의 엄마가 밥상을 차리는 하나를 나무라는 장면에는 분명 엄마 자신이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어린 딸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데에서 나오는 죄책감이 담겨있지 않을까? 아니면, 말로만 나무랄 뿐 행동으로 말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직접 하려고는 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조금 더 참고한다면, 하나의 엄마 자신조차 가정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는 자포자기의 감정이 담겨있는 것이지 않을까? 수저나 음식이 아니라 항상 노트북이 올라와 있는 식탁을 엄마의 정체성에 대한 비유라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엄마라는 역할이 처한 한계에 대한 하나 엄마의 부정denial의 감정의 형상화라고 봐야 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영화 전체적 주제와 초점과는 상관없더라도, 바로 그 식탁 위에 역시나 놓여 있었던 그 노트북이 우유 세례를 받는 장면은 가슴 아프다. 그리고 그러고 나서야 엄마가 마치 마음을 고쳐먹은 것처럼 하나가 원하던 가족여행을 추진하는 것은 더욱 아프다. 그래서 노트북 때문에 혼날 줄 알았던 하나가 가족여행을 가자는 엄마의 말에 반응하는 그 표정은 결코 단순히 자신이 원하던 것을 예상치 못하게 얻게 된 아이의 당황스러운 표정이라고만 표현할 수는 없겠다. 그때, 하나는 자신이 해왔던 어른 이해하기 혹은 어른 흉내내기에 있어서 가장 큰 실패를 경험한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우리, 즉 어른들이 아이들을 결코 예상하거나 예단하거나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 주인공이 자신이, 즉 어린이가 어른들을 결코 예상하거나 예단하거나 이해할 수 없음을 먼저 깨달은 것이다.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이 영화는 계속해서 어른들을 프레임 밖으로 열심히 내쫓는다. 혹은 그저 아이들 곁에 어른들이 아무도 없는 것이거나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한 메시지들은 이 영화에는 부수적인 것들이 된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는 단순히 관객에게 어린 시절을 돌이키면서 추억을 곱씹게 하는 것만은 아니며,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교훈적 반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만도 아니며, 그리고 아이들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는 간접 경험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 또한 아니다. 윤가은의 영화는 그저 관객에게 바로 이 아이들, 그러니까 어떤 아이들을 마주하게 하는 데 그 목적과 미덕이 있는 것 같다. 우리들 어른들이 각자의 상황과 환경에 처해 있듯이 바로 그렇게 각자의 상황과 환경을 감당하고 책임지고 있는 아이들을 진정 만난다는 것은 그들이 그들만의 '우리들 세상'을 살아내고 있음을 목도하고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웃는지 본다는 것, 그들이 어떻게 화내는지 본다는 것, 그들이 어떻게 우는지 본다는 것, 그들이 어떻게 현실을 받아들이는지 본다는 것, 그들이 그들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내는지 본다는 것, 우리는 그들이 아니고 그들에 대해 절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 아이들은 아직 어른이 아닐 뿐이지만, 우리는 이제는 결코 아이들일 수 없다는 것. 하나에게 온 가족이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우리는 겨우 예감할 수 있을 뿐이며, 그렇기에 하나의 마지막 표정과 숨소리를 마주한 후, 결코 다 안다는 듯이 이 영화를 사유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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