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형식 Aug 16. 2019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2 / 사막별의 오로라

김정 황은후 / 2019.08.10 /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처음부터 연극은 하나의 가상 세계를 구축하려 한다. 이것은 적어도 이 연극이 대충 어떤 내용을 담은 연극인지 어느 정도 예감을 했거나 미리 알아보고 온 관객에게는 어떤 긴장감 혹은 우려를 주기도 한다. '혹시 이 연극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하기 위해서 세상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무대에 올리기만 하는 그런 연극은 아닐까?' 그러나 이 연극은 서두르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하고서 묵묵히 한 장면씩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다. 애초에 이 연극의 목표는 어떤 숨겨지거나 의식되지 못하는 세상을 단순히 무대에 올려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 속 어떤 관념들의 거짓 체계들을 무너뜨리는 데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연극에서의 패러디 전략의 훌륭한 본보기일 것이다. 


 먼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존재에 의한 여성 실종 사건이 이 연극에 설정된다. 어떤 유튜버에 의해 실종 사건들 사이의 유사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실종자들이 하나같이 유행이 지난 일자 눈썹을 아직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여성들 사이에서는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어떤 획일화된 미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실종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들이 자리 잡게 된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공포에 대한 가장 선풍적인 반응으로 'New Beauty 운동'이 붐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여성들로 하여금 마치 연쇄 실종 사건 범인의 정체를 알 수 없듯 누가 정했는지 모를 획일화된 미의 기준으로 스스로 나서서 자기 자신을 검열하게 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기 위하여 그 어떤 노력과 고통도 감내하도록 조장하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범사회적으로 번지게 되고, 그럴수록 여성들은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검열하고 자책하고 나아가 자학하는데 그 강도도 점점 심해진다. 결국 (왜곡된) 아름다움을 위해 최고의 노력을 한 사람을 뽑는 TV 뷰티 콘테스트에서 우승자 뷰티퀸이 되기 위한 경쟁 도중 참가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리고 그 운동을 주도한 단체의 문제점들이 드러나면서, 운동은 사그라들고 연극은 막이 내린다.

 겉보기에 그저 가벼운 농담처럼 보일 수 있는 이 간단한 줄거리 속에서 등장하는 단 두 배우의 탁월한 패러디 연기는 관객들을 웃프게 만들며 이 연극의 내용이 어떤 사실의 과장이 아니라 현대 여성 역사에 대한 요약인 것처럼 보이게까지 하는 것 같다. 또한 단순히 연기만이 아니라, 두 배우의 공동 연출과 구성에 있어서도 연극은 탄탄하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데. 줄거리가 진행되는 동안 두 가지 종류의 장면이 각각 세 번에 걸쳐 반복되면서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진지하고 동시에 날카로운지 알 수 있다. 하나는, 두 여성이 각자의 옷장과 거울 앞에 있는 장면이다. 연극의 초반에 그들은 여러 옷을 입으면서 자신들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 티를 낸다. 중반에는 옷을 입지 않은 채 자신의 몸의 살을 손으로 쥐고 꼬집고 때린다. 모든 사건들이 끝난 뒤 마지막 장면에서는 두 여자는 그저 아무 편한 옷이나 입는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첫 번째 장면에서는, 여성에게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듯한 세대를 아우르는 노래들이 거리를 메우는 와중에, 두 여자는 각자에게 불편해 보이는 옷을 입고서 납치 사건의 피해자가 될까 두려워하고 경계하면서 서로를 지나친다. 두 번째에서는, 두 여자가 서로를 검열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둘은 서로의 화장술과 패션, 신체에 대해서 지적하는데, 나는 두 배우의 연기로 인해 엄청나게 코믹스럽게 보였던 이 장면에서 어떤 의외의 감동을 느꼈다. 그것은 기존의 남성들 혹은 수컷들의 이야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별하고 소중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두 여성이 보여준 서로에 대한 검열과 지적과 평가 속에는 어떤 작고 미약하고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하지만 결국은 최선을 다하는 연대의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감히 이 장면을 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이것은 이 영화의 자유로운 해방의 결말을 마련하기 위해 제공되는 단서들(연쇄 실종 사건들의 유사점을 찾아내어 알리는 유튜버, 뷰티퀸 콘테스트 중 사망한 참가자를 걱정하는 다른 참가자 등) 중 가장 의도치 않게 드러난, 고로 우리가 정말로 '여성적인 것'에 대해서 기대할 수 있는 '연대'라는 열쇠에 대한 가장 획기적인 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서로를 알지 못하는 그저 스치는 여성들끼리조차 그들은 함께 생존하기 위해서 서로를 걱정하고 도우려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근본적으로 좋거나 옳은 방법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말이다. 물론 결국 '뉴 뷰티 운동'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표면적으로 이 연대감에 의하여 망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후 두 여자가 편한 옷을 골라 입고서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거리에서 서로를 스쳐 지나가는 세 번째 장면에서 이 연극의 두 배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로 그 연대감을 탁월하게도 말 그대로 그렇게 표현해낸다. 여전히 어떤 긴장감은 있더라도 이전과는 다르게 편안해 보이는 표정과 몸짓으로 두 여자는 서로를 스치면서, 서로의 뒤를 돌아보는데, 타이밍이 교차하여 서로를 동시에 보지는 못하고 엇갈리고 만다. 이 장면이 정말로 어떤 의미의 장면인지 나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시선'에 대한 표현이지 않았을까. 서로를 검열하고 위축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걱정하고 지켜내기도 하는 그 시선의 오묘함에 대한 표현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바로 그 시선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우리 스스로에게 제공함으로써,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여성스러운 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다르게 말해서는 획일화되고 고정된 의미와 기준들에 대한 거짓 신화를 깨부숨으로써, 우리는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두 배우는 이 연극의 처음 장면과 마찬가지로 객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자신들을 비추면서 동시에 심리적으로 가두기도 하는 조명 아래를 벗어나고자 시도한다. 한 명이 용기를 내어 조명을 벗어나고 다른 한 명이 두려움에 머뭇거릴 때, 그들은 서로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내고 또 기꺼이 도움을 준다. 조명에서 벗어난 두 여성은 자유롭게 무대를 뛰어다니며 춤을 춘다.

작가의 이전글 숭배와 혐오, 혹은 숭배라는 혐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