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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Mar 09. 2023

다섯 번째 #02

"스스로 어떤 짐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생각."

 예술 행위에는 어떤 부조리, 어떤 기만성이 있다. 아니, 더 넓은 의미에서 아예 말을 한다는 것 자체에는 어떤 부조리, 어떤 기만성이 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내 뱃속 또는 내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를 뱉어 내거나 끄집어내어, 들려주든 보여주든 타인 혹은 자기 자신으로 상정될 어떤 세상을 향해 주의를 요구하고 작용과 반작용의 랠리를, 그것의 지속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이러이러한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지금 여기에 있다"라고 확신한 상태에서 그것을 알리며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증빙하려는 확언적 인정 투쟁의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의 사태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오히려, 말하기는 "내가 바로 여기 있다"는 확신에 근거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전혀 확신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런 확신에 대해 저 멀리 초월해 있거나 아니면 한참 모자란 상태에 있다. 혹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거나 그런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의식의 상태에서 사람은 말하기라는 행위를 행한다. 즉, 말하는 사람은 그 순간 자의식이나 인정 욕구 따위와는 동떨어져 있다. 그럴 겨를이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들은 있다고 해도 언제나 말과 말 사이에서 뒤늦게 해석될 뿐이지, 그런 것들이 말을 구성하거나 추동하진 않는다. 우리는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 단순히 주목받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이미 그런 상태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혹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말을 상대방에게 건넨다. 자신의 존재와 그 의미를 매 순간 느끼고 확신하면서 타인에게 말을 걸 순 없다. 왜냐하면 그 일의 순서가 사실은 반대이거나, 아니면 거기서 더 중요한 것은 존재나 그것의 의미 따위가 아닌 단지 말할 때의 방향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나 지금이 어딘지 언제인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정하거나 알려고 하는 건 일단 차치하고서, 그저 나와 너의 주고받음을 위해서만, 우리는 말을 꺼낸다. 그래서 말하기는 자동적으로 타인을 상정하는 원심력적인 행위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더라도, 그리고 자신이 지금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말이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바깥에 있는 자신을 향하거나 아예 자기 자신을 바깥으로 내모는 것이므로, 말하기는 자기 자신을 버리며, 어떤 방향을 향해, 미지의 관계, 어떤 비어있는 공간을 향해 내던지며 시작된다.

 그래서 바로 그 부분이 말하기의 부조리, 기만성을 구성한다. 화자가 청자에게, 그들 둘의 관계가 서로 섞일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완벽한 타자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는 말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고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할 겁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믿지 않으면 도대체 어쩔 것이란 말인가? 말의 건네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방법도 없다. 청자에게 중요한 것은 해석과 응답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그 말의 실재를 믿어야만 한다. 하지만 여기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화자 자신의 말에 대한 화자의 믿음이다. 그때 화자는 말을 건네받는 청자와는 반대로 자신의 말하기를 믿을 것인지 회의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놓인 것 같다. 하지만 화자가 자기 자신의 말하기를 믿지 않고서는 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든 말든, 말하기는 이미 행해지고 있다. 청자가 이미 화자 앞에서 화자의 말을 기다리고 있거나 믿고 있을 뿐 아니라 화자의 모든 시간을 말하는 시간으로 상정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동시에 그 믿음의 선택이 말하기 전, 중, 후, 모든 시간대에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이기도, 아니 언제나 가능하기에 언제든지 선택을 해도 언제든지 다시 새로운 선택에 놓여 있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화자가 자신의 말하기를 믿든 믿지 않든, 그보다 먼저 화자의 잠재적 또는 현재적 말하기는 타자로서의 청자의 존재를 이미 믿고 있기에, 말에 대한 믿음은 언제든 (재)선택 가능할지 몰라도 말하기에 대한 선택은 불가능하다. 즉, 우리에게 자신의 말에 대한 믿음을 망설일 기회는 언제나 있지만, 말하기를 망설일 기회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말이 건네지자마자,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타자들의 현실에 귀속된다. 타자는 셀 수 없이 생겨나며 사실상 끝없이 추동되는 시간의 재료인 것만 같다. 그 건네진 말이 제대로 가 닿든 닿지 못하든, 말의 릴레이가 길든 짧든, 그 말이 명확하든 불명확하든 상관없이, 말이 상정하는 말속의 실재하거나 실재하지 않는 존재들과 말이 가 닿을 역시나 실재하거나 실재하지 않는 존재들, 또는 말이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하고 맴돌 때의 그 실패한 말의 잠정적이고 익명적인 불명의 청자조차 포함하는 타자들을, 말은 분명히 만들어 내면서 우리를 어떤 시간들 속에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편입시킨다. 우리 각자에게서 말이 일단 출발하면, 그 무수한 타자들에 대한 각각의 '나'들의 책임은 피할 수 없고, 거기에 끝이란 없다. 말하기는 그것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화자 자신을 죽이려는, 가끔은 스스로 희생하려는 행위다. 심지어 말하기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지 않을 때조차 행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있을 때조차 우리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또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때조차 우리는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인 또는 최소한 대자로서의 자신을 어떻게든 향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며, 그 방향의 의미를 단지 찾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존재와 그 의미에 대해 확신하는 상태에서 말하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난센스인 것이다.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또는 무의미를 향하는 것이 이미 말하기다. 인정 투쟁을 위한 수단이 말하기이거나 말하기의 궁극적 목적이 인정 투쟁인 것이 아니라 인정 투쟁의 의미 또는 무의미를 찾는 것이 이미 말하기다. 즉, 말하기란 "내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존재한다"라고 의식하고 또 그것을 말하거나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어떤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애초에 이미 말하기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어떤 식으로든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즉, 우리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할 때조차, 그것을 주장하고 또 인정받으려 할 때조차 내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며, 그래서 나의 존재는 물론 내가 하는 말에 대해서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으며, 매 순간 나를 버리고 죽이며 '나' 밖으로 내던지려 한다. 즉 우리가 '나'와 '너'로, '자신'과 '타자'로 구분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의 '나'에 갇혀 있다고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소통을 위한 거점으로서의 재료, 어쩌면 문법을 위한 통사 따위의 재료가 필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들의 사명은 그저 소통-존재에 기여하고 봉사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소통하는 양식이고 그것이 다시 우리가 존재하는 양식이다. 우리는 매 순간 소통하기 위해 스스로를 (가지고 있다가) 버린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그리고 그것을 어느 정도라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말로 자신의 말하기에 대한 믿음을 영구적으로 확보하고서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고 주장하고 요청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기만적이라거나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부조리 없이는 소통이란, 존재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내 질문은 이것이다. 바로 그 부조리 앞에서 멈춰서 그것을 골똘히 응시한다면 말의 사태는 어떻게 될까?


 어떤 배우가 무대 위에서 어떤 연극을 선보인다고 해보자. 그때 배우가 감각하는 것은 그의 몸과 몸이 있는 공간과 그것들의 중력을 가르며 그가 만들어내는 자신만의 시간이며, 자신이 보이고 있다는 의식을 포함한 무수히 많은 사실과 착각들의 총집합일 것이다. 배우가 그 자신의 감각과 의식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듯이, 바로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도, 만약 관객 없이 배우 혼자만 있는 극장이라면 배우가 의식하고자 하는 자신의 보임이 상정되는 어떤 시점 또한, 자신이 무대 위를 향해 있음으로 인해 감각할 수 있고 또 의미화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하지만 배우도 관객도, 그것들 모두를 일일이 열거할 순 없어도 그중 몇 개를 능동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선별하여 의식하고 기억하고 언급할 순 있다. 배우는 분명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연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배우가 그것들이 자신이 반드시 했어야만 했던 바로 그 연기였을까를, 그러니까 가능한 모든 주제들 속에서 최우선을 선별하고, 가능한 모든 동작과 표현 방법들 속에서 최우선을 선별했어야 하지 않았냐는 다소 무리한 회의감에 젖어 스스로를, 그리고 스스로의 말하기를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니, 배우가 차라리 자신이 하려는 연기가 어느 정도 거짓은 아닌지를 끝없이 회의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더 심하게 나아가서, 자신이 하려는 연기가 거짓은 아닌지를 회의하고 의심하는 바로 그 연기를 배우가 한다고 할 때, 바로 그 연기를 하면서도 그것을 할 때의 자신의 연기가 일부라도 거짓은 아닌지를 끝없이 회의하고 의심한다면, 어떻게 될까? 배우는 결코 연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배우가 스스로 연기할 수 없다고 할 때조차, 배우가 무대 위에 있는 한, 혹은 무대를 벗어나 무대를 비울 때조차, 관객 입장에서 그것은 연기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관객이 그렇게 받아들일 거라는 것을 아는 배우 자신 또한 그것이 연기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란 것을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배우 자기 자신한테만은 그것이 연기가 아니라고 스스로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일 것이다. 배우 자신한테만.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미 배우가 스스로에게 하는 고백 형태의 말하기이다. 그것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스스로에게만 말할 때 생겨나는 자신만의 의미를 음미하고 기억할 배우 자신이 관객이 되는 어떤 퍼포먼스가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태는 공연 뒤에도 이어진다. 공연이 끝나고, 어떤 관객에게서 공연에 대한 비평이나 감상을 듣거나, 공연 전반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며 의문 섞인 질문을 받거나 공연 전체나 특정 장면의 의도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혹은 그런 것들을 배우가 스스로에게 제기한다면, 배우는 곧장 무대 위에 있는 순간으로 돌아가서 멀뚱멀뚱 서 있는 상태로 모든 것을 곱씹어보고자 하거나 모든 것 앞에서 말을 잃을 것이다. 바로 그 말을 잃는 모습 또한 그 배우의 말하기다. 말하지 못하는 말하기. 말하기는 이처럼 시간 마냥 끊김 없이 바로 다음으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그것을 피할 방법은 없다. 배우는 그다음에 무얼 할 수 있을까? 배우는 자신이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을 훌륭하게 충분히 그리고 무엇보다 솔직히 말했다고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차라리 아예 말을 잃을 수조차도 없는, 벗어날 수 없는 이러한 말의 사태, 말하기의 부조리 앞에서, 그것을 감히 허무하게도 뻔뻔스럽게 극복하거나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혹은 위대하게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모두를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바로 그 자신이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자연스럽고 진실된 말하기를 끝마칠 수 있을까? 시간과 말하기에는 정말 끝이 없는 것일까? 혹시 이 부조리의 연쇄를 빠져나가기 위해서 말하지 않아도 들리며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연기를 상상하는 것은 배우의 무기력과 나태함의 산물일 뿐일까? 배우는 그럼에도 이 모든 회의들과 질문들을 안고 결국은 자신만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즉, 산다는 것이 자기 자신만의 난제를 비밀스럽게 품고 그것과 매일 다툰다는 것이라면, 기만성 문제를 포함한 이 모든 질문들은 이 고민을 하는 이 배우에게만 한정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한 이 배우의 삶을, 말하기를, 목격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말 그대로 아무도 어떤 사람의 깊은 속을, 비밀을, 혼잣말을 알 수 없듯이, 그것은 절대 알려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 또한 말하기이다. 최소한 들리지 않는 말하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에게도 목격되지 않는 각자의 말하기들이야말로 각자의 삶을, 아니 우리 서로의 삶을 비밀스럽게 지탱하고 있는 위대한 말하기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배우가 원하는 대로 이 끝없는 말하기의 연쇄의 불가능해 보이는 끝에 이르기 위해서는, 혹은 그 끝없음의 원리와 원동력 그리고 나아가 효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하기의 부조리를 진정 이해하고 스스로에게 자연스러운 말을 내뱉기 위해서는, 어쩌면 우리는 시작을 향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다루려는 것은 그래서 말하기의 끝이 아니다. 나는 시작에, 아니, 만약 끝이 없기에 시작도 없을 것이라면 시작도 끝도 그저 무한히 미뤄지거나 망설여지고 있을 뿐일 것이니, 그 시작의 아직에 대해 말해야 할 텐데, 나의 이런 말들을 포함해 이미 모든 것이 말하기라면, 말하기가 시작되기 이전을 상정하고 상상하는 것은 모순적이고 역부족일 것이다.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성이란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즉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시작과 끝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그 두 극단의 지점에 접근 가능하다거나 시작부터 끝까지의 모든 것을 포착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시작도 끝도, 이전과 이후라는 방향성을 가진 하나의 말일 뿐이고, 각자의 방향성을 향해 이별하듯 멀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빅뱅의 시작도, 우주의 끝도 멀어지기만 할 뿐인 것처럼, 자신이 태어날 때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흐릿해지거나 잊히고, 자신의 죽음이 언제나 아득하거나 믿기지 않고 그 이후가 끝이 아니라고 믿고자 하거나 그 이후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우리 모두 인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대신에 실패하는 말하기를 상정하고자 한다. 실패하기는 끝으로 시작을, 그리고 시작으로 끝을 재시작하고 재소진한다. 실패하는 말하기는 말하기인가 아닌가? 말해진 것인 것인가 아니면 말해지지 못한 것인 것인가?


 만약 그러한 실패하는 말하기, 말하기의 실패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방향을 잃고 떠도는, 하지만 인과적이지 않고 연속되지 않아 궤적을 쉽게 그릴 수 없는, 양자역학적으로 불확정적인 산발적이지만 각기 홀로 있을 뿐인 웅얼거림처럼 보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은 혼잣말, 혼자 썼다가 지워버린 습작시와도 같은 것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실패는 과연 수행 가능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실패한다는 것은 노력의 의도와 목표한 바의 의미와는 반대의 결과가 벌어진다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의도와 의미, 그리고 명분과 방법에 대해 끝없이 회의하느라 말하기를 실패하는 어떤 배우를 보고 있다. 배우는 말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어떤 짐을 지어야 한다고, 그리고 어떤 짐을 지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 자체가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지문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연기하지 못하게끔 하는 어떤 뫼비우스의 띠 같은 족쇄가 된다. 매 순간이 연기인 것 같으면서도 결코 연기를 할 수 없을 것만 같다고 느끼는 배우에게 이제 무대 위와 아래, 무대 안과 밖의 차이는 없다. 그 말은 모든 곳이 무대이며 따라서 배우가 벗어날 곳이 없다는 것이다. 배우는 어떤 짐을 지어야 할지에 대한 답을 위해 떠돈다. 하지만 말하기의 기만성 앞에서, 부조리 앞에서 배우가 하는 것은 자신이 질 짐을 선택하기를 유보하고 지연하는 것뿐이다. 혹은 배우는 자신이 어떤 짐을 지는 모습에 대해서 그저 상상하기만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 만족하거나 아니면 상상 속에서조차 실패한다면, 그곳에서 갇힐지도 모른다. 어쩌면 무대 안과 밖의 차이가 없어졌듯 배우의 상상과 현실의 차이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의 유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배우가 매번 말하기를 실패한다는 것을 넘어서 아예 말하기의 본질이 실패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그 방향 상실이 어떤 의미, 아니 어떤 시작을, 의미를 소진함으로써 시작되는 시작을, 말하기와 존재하기로서의 배우의 연기의 본질이 만약 배우 자신을 실패에 희생시키는 것이라면 배우 자신을 완전히 소진함으로써 시작될 어떤 시작을 말 그대로 시작할 수 있을지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성공과 실패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위한 시간의 마련 또는 시간을 삼키기 그 자체가 배우에겐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결국 그 배우는 바로 그렇게 말하며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 배우는 무대 위에서의 시간을, 자신의 시간을, 관객의 시간을, 무관심의 시간을, 익명의 시간을 소진하는 자이며, 소진되는 시간을 소진하는 자이다. 그는 이미 무대 위에 있는 자신(들)이 무대 위에서 나타날 방법과 그 명분과 그 의미를 모색하느라, 있음에도, 그러나 여기저기에 다발적으로 불확신하며 있기 때문에 통상적 의미의 있음으로 있지 못하는 자이나, 마침내 그가 기어코 해낼 수 있는 것은, 그가 그토록 두려워한 것처럼 무대 위에서 존재를 뽐내는 데에 만족하거나 자신이 진 짐을 훈장처럼 전시하는 것이 아닌, 그리고 그가 스스로의 연기가 준비되지 않았고 시작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에 당장은 불가능할 뿐인, 말하기의 기만성을 훌륭한 진정성으로 견디고 제압하고 설득하면서 자신이 진 짐을 위해 무대를 내어주고 그 짐의 존재를 명쾌하게 증명해 내는 것도 아닌, 그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무대 위에서 결국 사라지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비존재에 대한 상상, 기억, 사유를 관객들로부터 추동하는 것이다. 그러한 양식의 말하기, 존재하기가 가능하려면 그러한 불확정적 시간들에 대한 믿음과 그 시간들과의 만남과 헤어짐과 기다림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실패들의 적층이 조용히 침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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