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공명을 위한 두 개의 연극

영화 <햄넷> 후기

by 맹글다

비극적 죽음과 운명을 거스르려는 시도, 고전적 문체와 서정적 발화, 그리고 제비꽃. 영화 속 투영된 그의 문학적 색채를 보고 있자면 <햄넷>은 셰익스피어의 문법을 정직하게 계승하는 작품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견고한 문법적 프레임 안에서 정작 서사를 지탱하는 중심축은 우리가 흔히 아는 대문호가 아닌, 그의 아내 아네스가 되어 사랑의 시작부터 죽음의 슬픔까지 생의 순간을 오롯이 마주한다. 위대한 극작가는 아녜스의 남편이자 세 남매의 아버지인 '윌리엄'이라는 원경 속 존재로 잠시 물러나있다.


영화 속 아녜스의 곁을 맴돌며 그녀를 ‘태양’이라 부르는 윌리엄의 모습은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선명하게 규정한다. 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빌린 은유나 단순한 연인 간의 이끌림으로 볼 수도 있지만, 영화가 묘사하는 둘의 관계에서 '태양과 지구'는 그보다 넓은 개념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빛을 발산하는 태양과, 그 곁에 머물며 스스로 빛을 내는 대신 그녀의 빛을 투영하는 지구.


이들은 각기 다른 세계 속 존재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아녜스는 생명의 중심인 태양이자 대자연 그 자체인 원형적 존재이다. 그녀는 울창한 숲 속, 생명의 근원과도 같은 구멍 곁에서 눈을 뜨며 만물의 기운을 읽어내는 영험한 힘을 지닌다. 반면 윌리엄은 대자연의 모방인 '문명'을 대변한다. 윌리엄이 건네는 새 장갑은 이미 어머니의 장갑을 가진 아녜스에게 불필요한 대체품일 뿐이며, 팔찌가 된 원석은 자연의 힘을 잃고 가공된 장신구로 전락한 무언가에 불과하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점차 멀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를 하나로 잇고 공명하게 만드는 매개체는 윌리엄의 연극 <햄릿>이다. 무대 위 <햄릿>은 죽은 아들의 이름을 빌려온 왕자의 이야기이며, 세트장도 자연의 숲과 닮은 나무판자인 윌리엄의 또 다른 모방일 뿐이다. 그렇지만 연극은 투영된 모방 속에서 오히려 진실된 감정의 그릇이 되어 세계를 교차하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죽음과 삶의 사이에서 아들을 다시 만나고, 두 사람의 세계를 이해한다.


영화 <햄넷> 또한 하나의 연극이다. 이 비극의 주연인 아녜스를 통해 관객들은 실재하는 고통과 깊이 공명한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사실적인 출산의 고통과 자식을 잃은 슬픔은 현실-픽션, 과거-현재가 혼재하는 연극 속 감정의 궤도를 온전히 공유하게 만드는 감독의 무대장치 중 하나가 아닐까.


아녜스는 사랑하고 슬퍼하고 애도할 것이다. 우리는 그녀만을 위한 이 두 개의 연극을 그저 숨죽여 지켜볼 뿐이다. 눈시울을 붉힐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다시 돌아와 다시 그녀와 공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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