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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모벳 Jan 21. 2020

딸천재의 두 줄, 빨간 줄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임신이라고 한다

빨간 실과 빨간 줄

결혼의 시작과 그 이후를 함께하는 남녀가 서로에게 격렬한 리액션을 기대하는 순간이 두 번 정도 있다.
하나는 빨간 실 앞에서 남성은 여성의 리액션을 기대한다.

프러포즈,

남녀의 인연의 빨간 실 묶기 직전의 순간 말이다.
다른 하나는 빨간 줄 앞에 서 있을 때.
이번에는 남성의 리액션이 중요한 타이밍이다.
나의 빨간 줄은 벌써 8년 전이다.
눈앞에 빨간 줄이 있었다.
빨간 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호적에 빨간 줄'이라는 관용어가 먼저 떠오르네.
실제로 전과자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지지는 않는다.
이 표현의 기원을 안다면,
지금은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진 것을 자랑거리로 삼을 수 일 터.
호적에 빨간 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경찰이 적색분자나 중요 시찰 대상 수형 기록부에 구분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사회불안 사범이나 소요 분자 사상범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는가,
독립운동가라는 것이지.
‘선조 중에 진짜 호적에 빨간 줄이 있다는 것은 사실 자랑스러워할 일이겠군’라고 엉뚱한 생각에 빠지다가 다시 정신 차리고 봐도 눈앞에 빨간 줄은 그대로다.
호적의 빨간 줄이고 뭐고 눈앞에 있는 빨간 줄은 지금 융모성생신선자극호로몬(HCG) 항원항체가 컨트롤 라인에 반응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옆에 또 다른 빨간 줄이 있고 플라스틱 구조가 둘러싸여 있다.
그러니까 그래 '임신 진단기'다.
임신?



빨간 줄을 대하는 남자의 뇌 속 화학반응

임신에 대한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상투적인 장면 중 하나가 떠오른다.
여자 주인공이 '나! 임신한 것 같아'소식을 알리고,

남자는 내부에서는 충격파가 발생하지만 얼굴까지 어떻게 나오지 않게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여자는 '왜 기쁘지 않아?'라는 말에,
남자는 '어어... 기쁘지... 음... 기뻐... 기쁘고 말고'라는 애매한 속도의 문장을 뱉는다,
여자는 눈치 빠르게 '자기 반응이 왜 그래? 아빠가 되는 게 싫어',
남자는 '아~뉘이이, 너어무 좋아아숴 고뤠취~이'라고 혼돈의 세계를 누르며 말하고,
여자는 분노에 찬 눈으로 보고,
남자는 당황하며 어버버 거린다.
티브이를 지켜보던 나는 감자칩 먹으며 쯧쯧 한심하군 혀를 차며,
딱 멋있게 축하한다 안아주면 되지 저게 무슨 꼴인가 쯧쯧.
하지만,

인생이라는 무대에 내가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이 장면을 마주하면 달라진다.

잘할 줄 알았지?
자 임신 소식을 듣는 장면에 들어갑니다.
레디 액션!
어... 멋있는 리액션이 안 나와.
내가 스릴러나 막장 드라마만 주로 보다 보니,
이렇게 임신 진단기에 빨간 두 줄이 딱하고 나오니까,
머릿속에는 먼저 남자 주인공은 두 손을 머리에 감싸고 괴로워하며 배경에는 신경을 자극하는 음산한 노래가 나오는 장면만이 떠올라.
도대체 어떤 식으로 기쁨을 표현해야 하지.
물론 아이를 원했지.

그리고 당연히 기쁘다.

그 기쁨이 너무나 낯선 기쁨이라 얼굴 근육에 적절한 표정 신호를 주지는 방법을 모를 뿐.

그리고 '내가 아빠라고?' 자각이 안된다.

일단,

눈앞에 있는 것은 빨간 줄 두 개가 그어진 플라스틱이야.

그 와중에 그 빨간 색도 빨간색인지 분홍색이 분간이 안 가고 흐릿하여,

내 혼란을 가중시킨다.
임신 진단기 자체는 내 아이도 아닐 뿐 더라 나를 닮은 구석이란 게 하나도 없잖아!
게다가 우리네 남자들은 여성들과 다르게 임신에 관한 직접적인 신체적인 변화가 없기에 오로지 나의 상상력으로 아이를 떠올리고 아빠가 되었다는 인식을 하며 리액션을 폭발시켜야 하는데,
상상력부터 벽에 막힌다.



참을 수 없는 상상력의 빈곤

내 아이가 아닌 그냥 아이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내 아이를 상상하라고 하면!

내 아이라...

내 얼굴, 와이프 얼굴, 내가 기대하는 얼굴, 내가 피하고 싶은 얼굴들이 마구 충돌한다.
명징한 얼굴은 안 떠올리고 대신 눈앞에 있는 플라스틱만이 강박적으로 떠오른다.
포대기에 쌓인 진단기,
유모차에 있는 진단기,
새벽에 울고 있는 진단기.
내 상상력은 원래 안 이랬는데,

정말 안 이랬어.
젊지만 외로운 시절이었다면,
나른한 오후 네시 입장한 카페에서,

아슬아슬하게 미인 영역을 빗나갔지만 매력이 넘치는 알바 직원이 미소 지면서 “안녕하세요” 인사만 해줘도,

텅!

순간적으로 뉴런이 파파팍 점화된다.
1.2초 만에 이미 머릿속에 상견례 식당에 메뉴 그리고 후식도 섬세하게 정했고,
결혼식에서 얼마나 우렁차게 대답할지도,
신혼여행 비행기 표 그리고 쌓인 마일리지는 어떻게 쓸 것인지도 정했고,
2초가 될 즈음에는 아이 이름 지어 놀이공원 놀라가는 뒷모습이 그려지며,

3초가 될 즈음에는 장성한 아이의 결혼식에서 절하는 아이 앞에 눈물 흘리는 장면이 지나가며,
알바 직원이 “무엇을 주문하시겠어요?”라고 말할 때 즈음에는,

가족묘자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그 너머 삼도천을 넘으며 '행복했던 삶이었어' 대사까지 완벽하게 다 그려냈는데.
임신이라는 중차대한 순간에 필요한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 갔단 말인가.
그래서 결국 흑역사에 남을 리액션을 했지.
어떤 리액션이냐고,

그냥 어버버.

지금 와서 왜 그런 리액션이 나왔는지 이해하는 데 나조차 시간이 걸린다.



그대는 준비하거라

남자 입장에서 프러포즈를 준비하는 게 고민이겠지만,
리액션이 떨어지는 여성 입장에서 프러포즈에 어떻게 리액션을 할 것인지도 고민될 것 같다.

리액션이라는 게 상당히 어렵구나.

분명 마음은 마티즈의 The dance인데,

리액션은 에드워드 호퍼의 People in the sun이 되면 곤란하지 않나.


육아 전쟁에 들어올 그대들은,

평소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게.
갑자기 빨간 줄을 봐도 당황하지 않고 멋들어지고 자상한 예비 아빠이자 남편의 모습을 한 번에 농축된 피드백을 준비하란 말이다.
자다가 이불을 발로 뻥뻥 차며 부끄러워할 리액션은 하지 말자.
보통, 예고도 없이 깜짝 선물로 눈앞에 들이미는 경우가 많다.
누가 나 임신 테스트한다며,

준비됐어? 까 보까? 자 지금부터 확인 들어가겄습니다잉. 따~라라란~ 따라란~ 따라란~ 따~ 쿵짝짝~ 쿵짝짝~ 따라리라라리...하며 하냐고.

보통 안 그래.
여성은 혹시 하는 마음에 준비해서 임신이면 갑자기 눈에 들이민다니까.
축! 너는 아빠.
엉?

아임 유어 파더?
솔직히 내 리액션은 아침 드라마에 어울릴만했다.
배경으로 귀를 긁는 배경음악이 나왔으면 딱 스릴러 한 장면이다.
불륜 관계의 상간녀가 폭탄을 터트리듯 임신 사실을 듣게 된 아침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볼 상 사나운 반응을 했던 것 같다.
만약,
지금 기억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로 간다면 정말 잘했을 텐데,
어떻게 준비할 거냐고?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가 없어.
그게 어떤 순간이지 아니까.

내 안에서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는 빅뱅을 눈으로 직접 보는 순간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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