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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레이 Mar 25. 2018

자존감 수업

친구 집에 들렀다가 책 한 권을 가져왔다.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이다. 친구가 이 책을 샀다는 얘기를 들은 게 어언 6개월 전인 것 같다. 그때부터 줄곧 빌려달라고 말했는데 이제서야 기회가 닿았다. 왜 그 책을 보고 싶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대략 몇 가지로 추려진다. 당시에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베스트셀러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고, 요새 자존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사람들이 그토록 찾는 자존감이 무엇인지 궁금했었고, 마지막으로 나의 자존감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시에, 내가 늘 애써 감추어왔던 나의 결핍을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던 걸까.
돌이켜보면 나는 자존감이 무척이나 낮은 사람에 가깝다. 지금의 나의 모습이 아니고 내가 가닿을 수 없는 곳에 행복 있다고 생각했고, 광명은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아닌 다른 길에 있다고 여겼다. 지금의 나 지금 내가 걷는 길은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불만의 대상이었고 그렇기에 다른 모습 다른 길을 그렸었다. 그 사이 정작 지금 내가 신경 쓰고 가꿔나가야 할 행복과 일상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그것 말고 더 좋고 큰 무언가가 다른 길에 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부족했던 걸 수도 있다. 나 자신은, 비하와 자학의 대상에 보다 가까웠는지도. 장점보다는 단점이,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이,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이 먼저 보였다. 문제는 내가 될 수 없는 나와 다른 사람이 누리고 있으리라 여긴 행복과 늘 나의 지금을 비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관심했다. 지금 내가 갖고 있고 내 주변에 있는 것에 대해.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니 작은 유혹에도 휩쓸리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가는 사람이 손짓하면 헤헤 거리며 그곳으로 따라갔다. 세찬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은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묵묵히 다른 사람을 비춰주는 등대 같은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비록 흔들릴지라도 자기의 기준이 있는 부표 같은 사람은 되고 싶었는데, 작은 파문에도 이리저리 갈팡질팡 흔들리는 깡통 같은 사람이 되었다. 물론 그런 삶도 나름대로 멋질 수 있다. 바닷물에 몸을 싣고 전 세계를 유람하며 수많은 새로운 풍경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바위, 등대, 부표는 꿈에도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바위, 등대, 부표 입장에서는 깡통의 자유로움이 한없이 부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깡통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즐길 때만 가능한 일이다. 전전하는 것과 순례의 차이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는다면 지금의 상황을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까. 여태까지의 나의 모습으로 봤을 때 등대 같은 삶을 살게 된다면 아마도 깡통을 부러워할 거다. 나의 현실을 인정하는 일이, 나의 민낯을 바라보는 일이 여전히 나에게는 어렵다. 그러니 아직도 내가 아닌 다른 것에서 변화를 기대하고 있는 것일 테고.
그런 의미에서 자존감 수업은 만사 제쳐두고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이다. 그런데 책을 펴면 나의 과오와 실수들이 연거푸 떠오를 것 같아, 손이 가지 않는다. 요새야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조금씩이라도 읽어야겠다.
자존감과 관련한 두 개의 짧은 글이 생각나는데, 하나는 곽정은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정새난슬의 글이다.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지만 그런 나의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노력하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 그러나 이 모습 그대로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자존감입니다.
스스로 비하하고, ‘난 사랑받지 못하겠구나’라는 것에 생각이 멈춰버리면 더 이상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고 노력하지 않게 되죠. 다만 어떻게든 나를 선택해줄 사람에게 구원받고 싶은 욕망만이 남습니다. 자기 차의 운전석에서 내려, 가장 먼저 나를 선택해줄 사람에게 운전대를 넘기게 되는 거죠. 위험천만한 인생의 히치하이킹을 하는 겁니다. 운이 좋았다면 좋은 사람을 만났겠지만, 당신은 자존감도 없었고 하필이면 운도 없었네요. 폭력적인데다 집착이 심하고 소통도 힘든 사람이 당신이 놓은 운전대를 잡아버렸으니까요. 자존감이 있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자존감이 바닥인 채로는 인생의 거의 모든 상황이 위기 상황으로 변해갑니다.>

<나 예쁘지 않아? 나 엄청 용감하지? 그림도 너무 잘 그리고 똑똑하지?”
아름답고 용맹하며 총명한 스스로와 사랑에 푹 빠진 딸은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내게 동의를 구한다. 겸손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미덕 중 하나이고, 유머러스한 자기 비하는 지루한 인생의 맛깔난 사이드 디시라고 믿는 나는 매번 당황한다. 네 살 된 딸의 엄청난 자신감과 자기 자랑에 놀라서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응… 너 최고야.” 나의 뒤늦은 대답을 듣고도 딸은 의문을 품지 않는다. 또다시, 자신의 멋진 점에 대해 크게 떠든다.
낯선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면 부끄러워하는 듯이 행동하지만 칭찬 자체를 부정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는다. 당연히 올 것이 왔다! 정당한 자기 몫의 칭찬인 양 부드럽게 집어삼킨다. 자기 확신에 가득 찬 딸의 표정, 나도 그런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을까. 딸은 자존감에 대한 베스트셀러를 집었다, 놨다, 고민하는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근사한 나’ 네 살 된 딸의 정신 승리. 마냥 부럽고 신기했지만 자만심으로 가득한 아이가 될까 봐 살짝 걱정이 되었다.
“너 잘난 척이 뭔지 알아?” “모르는데. 그게 뭐야?” “내가 이것도, 저것도 혼자 너무 잘한다! 난 다 가졌다! 내가 너희들보다 훨씬 낫다! 그렇게 행동하는 게 잘난 척이야.” “나는 잘난 척 안 하는데?” “가끔 어린이집에서 네가 뭐든 제일 잘한다고, 그러잖아.” “내가 제일 잘해.” “아니, 그게 사실이어도 말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왜?” “다른 사람들 생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 네 말 듣고 기분 나쁠 수도 있어.” “왜 기분 나쁘지? 내 생각에는 그래. 내가 제일 잘해.” “그래? 그래… 맞아.”
딸이 부쩍 향상된 한국어 실력으로 또박또박 반론을 제기하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간혹 딸에게 세상일을 설명한답시고 내가 덧붙이는 말 ‘내 생각에는 그래’. 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말을 되풀이했다. 겸손 대신 잘난 척의 못된 점을 가르치며 딸의 기를 꺾으려 했던 것은 나의 실수다. 남들이야 뭐라든, 자신이 최고니까 최고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딸은 잘난 척한 적이 없다. 그녀가 가진 떳떳한 팩트를 공표할 뿐이었다.
아이의 행동이 도를 지나친 것처럼 보던 것은, 자학과 겸손을 혼동하는 나의 문제다. 나는 남이 한 칭찬을 순순히 받아들이거나 스스로를 칭찬해서는 안 된다고(비뚤어지고 거대한 자의식을 남몰래 사랑하면서) 믿고 있었다. 나에 대한 타인들의 기대를 낮추고 응석을 부리려고 꾀를 쓴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못났다고 떠들고 다니면 꼭 누군가는 지치지 않는 위로를 건네곤 했다. 소화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 칭찬과 응원의 맛은 달콤했다. 겸손의 탈의 쓴 비겁함은 딸의 잘난 척보다 유아적이었다.
위선적인 엄마에게 일침을 가한 딸은 오늘도 자기 자랑을 한다. 예쁘고 용감하고 똑똑한 딸의 말엔 거짓이 없고, 나는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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