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 없이 화창한 풀들

<생각하는 시선>

by 한재민


기존에 있었던 패턴과 사뭇 다른 패턴의 스케줄이 나왔다. 운 좋은 자에게만 때때로 주어지는 해외 스테이가 조금 더 긴 패턴, 여러 취항지 중에서도 놀라움이 가득한 도시 '방콕'에서 머무는 시간이 하루씩이나 더 생긴 스케줄이 나온 것이다. 언제나 방콕이 궁금하다고, 그 생명력 가득한 꽃과 풀들을 늘 보고 싶다고 말하던 아내를 데리고 함께 가게 되었다. 여행으로 보내줄 수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런 스케줄일 때 함께 해보고 싶어서 기다렸던 것도 있다. 좋은 호텔에서 머무르며, 내가 잘 아는 곳을 방문하며 편히 쉬는 그런 일정을 선물하고 싶었다. 내게 찾아온 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평일에 근무를 하고 주말에 쉬는 아내에게 딱 맞아떨어지게도 목요일 밤에 출발해서 일요일 아침에 도착하는 스케줄이 나왔기 때문에 연차도 하루만 쓰는 것으로 충분했다. 한아름 찾아온 운을 놓칠 수 없어서 확 잡아챘다.



나에겐 역시나 뜨거웠던 방콕의 거리였으나 평소보다 구름 낀 하늘 덕분에 그나마 그늘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만 습한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방콕 호텔에서 외출한 지 5분 정도 지났을까. 방콕의 강렬한 더위에 열심히 적응하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금방 지칠 수 있는 날씨였지만,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던 방콕의 자연은 계속해서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다. 아름다운 색과 건강한 모습을 잔뜩 품고 있는 꽃과 나무를 보며 감탄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생명력이 묘하게 나를 자극했다. 지치지 말라며, 이렇게나 뜨겁고 열악한 곳곳에서도 우리는 굳세게 살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니 피하지 말라고, 견디면 질겨지고, 질겨지면 살 수 있다고.


택시를 잡아 왕궁으로 향했다. 왕궁 근처에 내리자마자 까맣고 윤기 가득한 현지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비는 내리지 않았으나 우산을 쓰고 있었다. 아마도 햇빛을 가리기 위한 도구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도 잠깐, 그는 우리에게 어디에 가냐 말을 걸었다. 왕궁에 가려고 왔다며 반갑게 대꾸했다. 그는 반바지 차림으로는 왕궁에 갈 수 없다며 아주 중요한 정보를 건네주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쉬운 마음이 그지없었다. 그는 우리가 실망할 것이란 걸 알았는지, 준비된 행동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들고 있던 우산을 나에게 잠시 맡겼다. 아주 자연스러워서 그대로 받아주었다. 어디서 갑자기 다가왔는지도 모를 한 남자가 어느 틈엔가 우산을 맡기면서 우리를 묶어두고 손에 수첩과 펜을 들고 우리가 다음 행선지로 어디에 가서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설명해주고 있었다. 얼마나 재미있는 장면이었는지, 방콕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을 손꼽아보자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왕궁은 가지 못하겠지만 배를 타고 방콕 강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며 곳곳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 설득하며 옆에 있는 툭툭이를 타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툭툭이라... 분명히 내 주변에 툭툭이 기사는 없었는데 매우 친해 보이는 그 기사는 재빨리 다가와 설득을 돕기 시작했다. 가면 재미있을 거고, 내가 태워다 주겠다고. 아주 친절하고 밝게 인사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 마냥 우리는 올라탔고 어느새 선착장에 도착해서 배까지 탔다. 배는 작은 배였고, 그들이 부른 값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깎고 또 깎다가 더는 힘들겠다 싶어, 추억이겠거니 생각하고 값을 지불했다.



배를 타고 1시간가량 강가의 마을을 둘러보게 됐는데, 초반부와는 다르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묘한 기분이 들었다. 비행으로도, 여행으로도 많이 오는 방콕에서 이토록 생소하고 열악한 강가의 마을을 마주하다 보니 진짜 방콕을 지나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리에서 봤던 것들보다 푸르고 드넓은 풀과 꽃과 나무가 끊임없이 펼쳐졌고, 사이사이에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물 위의 건물들이 보였다. 심지어 어떤 집은 베네치아가 떠오를 만큼 아름다웠으며, 어떤 집은 낡다 못해 썩은 나무처럼 보이는 것들이 지탱하고 있는 집도 있었다. 못 보고 지나칠 수 없는 삶의 진 모습이었고, 안 보고 지나치기엔 길고 긴 시간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러면서도 끝없이 펼쳐지는 진한 초록의 풀과 형형색색의 꽃을 보며 감탄했다. 그리고 그때 아내가 내뱉은 말이 너무나도 인상 깊었다.


"배를 타길 잘한 것 같아. 아마도 우리는 평생에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풀이 진짜 무섭도록 끈질기면서도 아름답게 터전을 이루고 있는데, 그걸 감상하다가도, 문득 풀들이 아무 생각 없이 너무 화창하게 피어있는 것 같아.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하고.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풀에게 예의를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내 마음도 그러했다.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강한 생명력을 지녔기에 그토록 굳세게 살아가고 또 살아있는 것일까. 이번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풀은 지칠 줄 모르고 화창했고, 꽃은 강렬하게 피어있었고, 나무는 외로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듯 무성했다. 어쩌면 여행객의 입장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몇몇의 사람들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그들 곁의 자연을 보며 화창하고 강렬하고 생명력 가득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해보니, 반바지로 실패했던 왕궁 대신에 갑자기 등장한 한 남자로부터 설득 당해 시작하게 된 투어가 이번 방콕에서의 가장 특별했던 시간이었음에 틀림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게다가 우리 주변의 또 어떤 것들이 아무 생각 없이, 화창하게 피어있을지 궁금해진 계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