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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인 Oct 27. 2024

고통을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고통 구경하는 사회>>, 김인정, 웨일북, 2023


오독오독 북클럽, 오독일기


작가님께,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라는 부제에서부터 마음이 덜컥이는 그런 책이었어요. 주말에 읽다가 멈추지 못하고 새벽에야 잤는데 그러고 나니 한 주가 아주 길었습니다.


  제 한 주 생활은 보통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이들 등교를 챙기고 출근을 하고, 회사에선 이런저런 일들 - 대부분 어떻게 이익과 매출을 늘릴 것인가 하는 주제가 깔려있는 업무들- 을 하다 퇴근길에 서둘러 장을 보고 - 혹은 배달을 시켜서ㅎㅎ - 저녁을 차려 아이들과 밥을 먹고, 집정리를 하고 아주 짧게 아이들과 놀거나 잠깐 폰이나 책을 들여다보거나 하다가 운동을 하고 돌아와 잠드는 삶. 보통의 삶. 나를 챙기고 가족을 챙기는 삶. 이렇게 그럭저럭 사람구실하며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 참 다행이야, 그래 대견하다 잘 살고 있어, 하고 스스로 다독일 때도 많아요.

  하지만 누군가의 피드나 어쩌다 본 뉴스 기사에, 눈에 밟힌 어떤 글귀나 사진에,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돌아가는 퇴근길 문득, 가슴 안쪽에서 저릿하게 좌절감이나 죄책감이 스며 나오는 순간들이 생기고 그러면 저는 길 없는 벌판을 헤매는 듯 막막해집니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읽으면서도 빈곤과 기후위기, 성차별, 노동자의 권리, 사회시스템.. 여러 이슈가 한꺼번에 거대한 파도처럼 나에게 밀려오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파도 앞에 선 기분이 드는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어요. 그 기분을 아마도 김인정 기자는 ‘공포’라고 얘기한 건 아닐까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카메라’에 관한 오랜 공포가 있다. 찍고 있지만 상황을 냉담하게 기록할 뿐,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 카메라.  …… 이 공포의 기원은 이걸 찍어서 보여준 뒤에도 내가, 이걸 본 뒤에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못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28p.


  나는 나만 챙기며 모든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해 그저 구경꾼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아니 구경꾼조차도 되지 못하고 아예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 듯이 애써 외면하며 살고 있지 않나? 마치, 미화노동자분들의 쉼터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에 있기를 바라는 입주민의 마음처럼. 그렇지만, 내 일상 안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무얼 해야 할까. 그리고 그 시도들은 과연 무얼 얼마나, 이뤄낼 수는 있는 걸까? 고통의 기원을 찾고, 아픔에 주목하며 공론화하는 일을 하고 있는 이 분조차도 좌절과 싸우는 모습을 여러 번 보게 됩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게 가능할까?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 우리는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51p.

세상은 어쩌면 끝없는 편파와 편파의 집합체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에 조금 더 설득력 있는 논리 구조를 세워 더 많은 연민을 끌어모으는 사람이 이기는 투쟁의 현장인지도 몰랐다. -151p.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책이 세상에 나온 이유도 기자님이 어느 정도는 내면에서 떠올린 질문들에 대한 답이 형태를 갖추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실 책이 답을 줄 것이다라는 생각은 뭐랄까, 누군가 답을 나에게 척척 대령해 줬으면 좋겠다 하는 제 게으르고 안일한 마음에서 나왔겠지요… 사실 이건 예상할 수 있는 답이었지만 책 안에 산뜻하고 명쾌한 답은 없었습니다. 대신 김인정 기자는 끊임없이 묻습니다. 사건의 당사자에게, 목격자에게, 그리고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선명한 흔적을 그리며 날아가 깔끔하게 과녁을 맞히듯, 정확한 질문이 하고 싶었다며, 이 책에서 물은 것은 명치 부근에 칼처럼 차곡차곡 쌓여가던, 남은 질문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날에는 혹은 앞에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남은 질문들.


  일을 하다 보면, 과정에 익숙해지기도 하고 주어지는 과제들이 늘어날 수록 효율적으로 일을 해내려는 생각에 새로운 시도보다는 익숙하게 과제를 ‘처리’해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음표를 더해가며 방향을 잡고, 더 나은 결정을 하려는 순간들도 있지만 어느 정도 길이 정해지고 돌이키기 어려운 지점까지 진행이 되고 나면 내 스스로 확신이 있어야 다른 이들도 설득할 수 있으니까,라는 이유로 자기 확신 혹은 세뇌처럼, 물음표보다는 느낌표로 일을 하곤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은 질문들, 이라 표현한 이 책에서는 기사를 작성하는 중에도, 기사가 나간 후에도,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도 계속해서 관점의 적정성을, 이목을 끌어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과 취재대상을 대상화하게 되는 일을 밸런스를, 취재의 우선순위를, 역할을, 계속해서 묻고 또 물으며 저널리즘의 이상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기자의 고민이 그려집니다. 찾고 싶던 답보다도 내심 놀라고 반성했던 건 이렇게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이 분의 태도였습니다.

  작가님도 말씀하셨죠, 복잡한 세상에서 선명한 언어와 선명한 입장을 가지고 싶어 했었지만 이 책을 읽고 더듬거릴지라도 나의 생각이 맞는지 끝까지 의심하고 싶어 졌다고. 다른 가능성은 없었을지, 가려진 다른 이야기는 없는지, 나의 고정관념이 폭력이 되지는 않는지 살피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고. 저 역시 빠르고 명쾌한 흑백논리의 답보다는 많이 답답하게 더듬더듬가더라도 가능성들을 고민하고 조금이라도 바른 답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고 싶어 졌어요.


  그리고, 수많은 질문들 사이에서 김인정 기자는 제가 가져온 죄책감과 좌절감에 대해 격려, 혹은 독려와 같은 답을 주고 있기도 합니다.


대상화를 무작정 멈추라는 말은 함정이다. 타인에 대한 말하기가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도울 기회를 알지도 못한 채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시선이 구경이 될 수 있다는 걱정에 빠져서 고통을 보는 일 자체를 멈춘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인간성 실패의 시작일 것이다. 36p.


존버거가 말했듯이,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 때론 죄책감이라는 통증을 넘어서야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는 걸 말하고 싶다. 나의 것이 아닌 고통을 보는 일에는 완벽함이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서로의 부족함을, 미욱한 애씀의 흔적을 조금씩 용인하면서라도 움직이기를 바라기에. 37p.


기자들은 시청자들이 뉴스를 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상상하며 뉴스를 전할까. …대개 자신의 일로 꽉 차있을 머리에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소식을 끼워 넣고 염려해 줄 가능성, 뒷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싶어 할 가능성, 나아가 뒷이야기를 새로 쓰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가능성. 줄여 말하면 행동과 변화의 가능성이다. 236p.


  김인정 기자는 책임감과 죄책감 사이에서 남긴 수많은 질문들로 고통이 포르노가 되는 현실을 성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 구경꾼에 머물지언정, 멈추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는 구경꾼일 뿐이라며 죄책감에 매몰되어 멈춰있지 말라고 말합니다. 미욱하게라도 애쓰며 뒷이야기를 써보려는 시도를 해보라며 격려합니다. <슬픔의 방문>에서 장일호 기자도 이런 말을 해주셨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고 보면 매번 듣고도 까맣게 잊는 것은 저네요.


답이 없다 말하는 순간 답은 사라진다. 나는 무관하다 말하는 순간 답은 없어진다. 제도는 언제나 사후적이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낸 변화는 거저 오지 않는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애써 일궈가야 한다. 질문들의 대부분은 정답이 없다. 정답을 찾아가는 최선의 과정이 있을 뿐. 새로운 세상이란 장소가 아니라 행동이다. 국가보다 중요한 ‘단 하나의 이웃’이 서로에게 되어주자. 우리는 모두 가까이 있는 사람을 닮아간다. 우리의 얼굴은 세상의 얼굴이다.  237p.


  아무것도 할 수 없다거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이란 암담한 나의 태도는 뭔가 선명한 목소리를 내야 하고, 또한 크게 목소리를 내야 하며, 이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거창한 변화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 여긴 데서 나왔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보지 않고 하지 않는 것보다 아주 작게라도 보고, 말하고, 하는 게 사실은 아주 커다란 차이일 수 있는데 말이죠. 얼마든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 수 있는 세상, 나와 다른 이들과 서로 연결되기보다는 되려 폐쇄된 채널에서 각자의 생각을 공고히 하기 쉬워진 요즘의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내 일로 꽉 찬 머리에 다른 이들의 아픔이나 소식에 대한 관심의 자리를 작게라도 마련하는 것, 하지만 그 관심이 섣부른 공감이나 침범이 되지 않도록 숙고하는 것, 매일의 삶에서 나의 주저함 가득한 고민을 더해 아주 작은 선택, 소소한 변화와 행동이라도 만들어 보는 것, 그리고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아주아주 조금씩이라도 반경을 넓혀가 보려 하는 것. 이 모든 걸 함께 할 수 있는 ’ 우리‘라는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가 어디 멀리 있는 가상의 그룹이 아니라 내 주변의 바로 이 사람들이며, 넓게는 지구반대편 실재하는 이웃들이라는 생각을, 아마도 분명 또 까먹겠지만, 기억할 수 있는 한 머릿속에 자리를 마련해 기억하며 매일을 보낸다면, 일상과 생각, 행동이 아주 조금은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격려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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