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키운 캐릭터를 해킹당한 후로, 나는 게임에 크게 의미를 갖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재미있게 게임을 하고 있거나, 나에게 새로운 게임을 추천해 줄 때면 "게임은 인생의 낭비"라고 말했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라거나, 나와 재미있게 게임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남편의 마음같은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게임을 하는 시간은 쓸데없고, 게임을 하는 건 한심하다'라는 이상한 인식이 박혀있었다.
만화와 게임을 즐겨하는 친구네 커플과의 만남이 있었다. 근황 이야기를 하던 중 친구는 게임을 하나 소개하며 재미있으니 해보라고 추천해주었다.
"오~그래? 한번 해봐야겠네, 게임 이름이 뭐라고?"
나는 관심있어하는 말투로 친구의 말에 화답했다.
"내가 전에 얘기했던 게임이야"라고 남편이 옆에서 얘기했고, 자연스럽게 '오늘 그 게임을 해봐야겠다'고 말하며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갔다.
집에 돌아오자 남편녀석은 불쾌함을 표현했다.
게임이 인생낭비라고 생각하면서 왜 그 친구들 앞에서는 게임에 관심없다고 얘기하지 않았는지 어째서 그 게임을 해보겠다고 말했는지, 그리고 그 친구들을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따지듯 물었다.
이상했다.
누군가가 "이거 해봐~"라고 말하면서 추천이나 제안을 하면, 당연히 "한번 해볼게"라고 대답하는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재미있는 경험을 토대로 내게도 추천해본 것일수도 있고, '나 이런거 해, 너도 해봐~'라는 상투적인 말일 수도 있지만, "해볼게, 추천 고마워"라고 대답하며 대화의 흐름을 이어가면 그만이다. (그리고 되도록 해보려고 한다. 말뿐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진짜 재미 있으면 나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니까)
"오~ 그래 해볼게! 나도 해봐야겠다"
누군가의 제의에 내가 할 수 있는 답안은 하나였다.
하지만 남편녀석의 말을 듣고 다른 대답을 생각해보았다. 게임을 추천하는 친구에게 굳이 '시간낭비인 게임을 왜하니?' 라고 말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대답은 떠오르지 않아 남편에게 물었다.
또 생각에 빠졌다. 내가 나름 정해놓은 정석적인(?) 대답을 하지않고, 굳이 '내 취향은 아니야'라거나 '난 됐어'라고 말하기엔 긁어 부스럼이지 않나? 굳이 상대방한테 내가 게임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할까? 내가 게임을 한다고 생각했으니 당연히 재미있는 것을 추천한 거겠지?
하지만 남편의 한마디로 내가 얼마나 상투적이고 표면적인 인간인지 깨달았다. 마음에 없는 소리까진 아니지만 내 생각과 무관하게 일단 무조건 상대의 의견에 동의해주는 말이 '필요'하고 서로에게 '좋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 나의 영혼을 덜 담은 리액션으로 상대방이 나에 대해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른 생각도 들었다. 나는 왜 게임이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게 된걸까? 어릴때 소닉3를 할때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화면에 빠져들 정도로 게임에 집중했는데. 끝판을 깬다고 해도 상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친구들을 모아두고 즐겁게 게임을 하고 잘한다고 칭찬받고 그저 그 시간을 즐겁게 보냈었다.
사실 몇달 전에도 추천 받았던 게임 '젤다 야생의 숲'을 열심히 했었다. 퇴근 후 취침 전까지 게임을 했으니 자기계발 하지않는 직장인의 모습으로 딱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남편은 "시간낭비한다"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하려 다른 젤다 시리즈를 소개해주었고, '재미있으면 그만'이라는 반응을 보였었다.
대수롭지 않은 게임 소프트 추천이었지만 큰 깨달음을 얻은 계기가 되었다.다른 사람의 의견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고 누구의 제안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거였다.
먹어보라면 먹어보려고 노력했고, 가보라면 가보려고 노력했고, 해보라면 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도 해봤어!"라며 다음 만남 때 대화를 이어갔다.
대신에 먹지못하면 가보지못하면 해보지못하면 나는 다음에 그 친구를 만날 자신이 없어졌다. 해보라고 했는데 안해본 것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해봤는지 추궁을 하지도 않을 뿐더러 안했다한들 날 죽이지는 않겠으나, 혹시라도 상대에게 실망감을 줄까봐 불안했다.
하지만 남편이 말한 대답은 말만 잘 한다면, 내 취향이나 의견을 제시하면서도 상대방의 기분이 나쁘지않게 적절히 넘어가는 방법이기도 했다. 부풀려 긍정하는 것보다는 담백하게 중립을 지키면 나도 감정적으로 부담될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상대방에게 나의 솔직한 면을 보이지 않다가 나도 모르게 그가 점점 어려워져서 피했던 적이 꽤 많았다.
남편의 말 한마디로 2~3가지 질문이 머리속에 계속 둥둥 떠다닌다.
1. 분명 어릴때는 정말 재미있게 했었고, 게임에 대해 비하할 이유는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게임을 '시간낭비'라고 여기게 된걸까?
2. 내가 하는 것들 중에 '시간낭비'가 아닌것은 무엇일까?무엇을 해야 낭비하지 않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