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만에 실내승마장

우등생과 열등생 사이에서 번뇌하는 사람의 이야기

by 노난

지난 수업의 충격과 이어지는 폭염폭우에

3주를 꾸물럭 거리다가 드디어 승마장에 갔다

내가 3주만에 승마장에 갔다는 사실을 나만 알줄 알았는데

승마장에 들어서자 마자

지난 시간 나의 자존심을 성심성의껏 밟아주셨던

라면코치님이 말을 걸었다


-

오랜만에 오셨네요

저랑 지난 수업 하시고 처음본거 같아요


-

(앗 그걸 기억하시다니..)

안녕하세요! 아..네..더워서...ㅎㅎ..


-

지난 시간에 제가 너무 심했죠?

죄송해요

저도 힘들었어요


-

(앗!!!!! 나만 마음에 두고 있었던게 아닌가!!!)

아아아..ㅎㅎ...아니에요..ㅎㅎ...아아..


날씨를 핑계로 상처난 자존심을 숨기려했던

나만의 비밀을 다 알고 있다고?

그걸 기억하고 있다고?? 수강생이 그렇게 많은데??

3주가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이 어색함 어쩔거야???


지난 시간을 복기해보면 이렇다

자신감에 차오른 내가 말을 끌고 원형승마장에 들어서자

그날따라 수강생이 많아서

깃털코치님과 라면코치님이 승마장에서 함께 코칭을 하고 있었다

깃털코치님은 코치님 사이에서 막내고

라면코치님은 최고참이다

몇바퀴 도는데 라면코치님이 나의 자세를 지적한다

발은 자꾸 팔자로 벌어지고 다리가 일자가 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타면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말을 컨트롤할 수 없다고 자꾸자꾸 혼낸다

하지만 이자세는 깃털코치님에게 전수받은 독일식 기승법의 기초로써...

나는 우리만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깃털코치님을 흘긋 한번 보고

라면코치님이 볼때만 다리를 애써 교정해봤다

그런데 잘 안되네?


수업 중반부가 지나도록 내 자세가 교정되지 않자

라면코치님이 나한테 말에서 내려보라고 한 후

스스로 시범을 보여주면서 알겠냐고 한다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그걸 못한다는 것은 알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억울했던 것은

아무말 하지 않고 있던 깃털코치님이었다

당신의 우등생이 지금 가르쳐준대로 탔다고

한순간에 열등생이 됐는데

내가 자존심을 다치면 당신도 자존심을 다치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치님과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아무말 못하고 탈탈 털리고 있는데 왜!!

코치님은 왜 가만히..아..!! 코치님도 비밀을 지키고 있는거야??


복합적인 마음으로 복합적인 구제불능의 딱지를 붙이고

바모스에 올라탔다

룸미러로 본 나의 눈은 점심시간 전 소망이처럼 슬펐어

슬펐지만 어쩔 수 없는 추진력 때문에

집에 오는 길에 근처 승마장 한군데 들려본 것은

너무 구차해서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그렇게 3주가 흘렀고

나는 다시 라면코치님과 깃털코치님을 마주했다

오늘 깃털코치님은 원형승마장에

라면코치님은 실내승마장에 있다

깃털코치님한테 인사했더니,

이제 실내승마장 가도 되지 않으세요? 라고 묻는다


무슨 소리야 지금

실내고 뭐고 오늘은 라면코치님 못만나

나 원형이야

원형승마장으로 루이를 타고 올라가

다시 우등생될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내가

몸을 풀면서 한바퀴 도는데

어젯밤까지 비가 많이 와서

원형 승마장의 바깥 흙이 진흙탕이다

루이가 진흙 위에서는 속도를 내지 않는다

말이 주춤거리니까 나도 무섭다


그랬더니 갑자기 깃털코치님이 말한다


-

오늘이 실내승마장으로 올라갈 타이밍같아요


-

아뇨아뇨아뇨

하필 오늘이요? 아뇨아뇨아뇨

(나는 라면코치님을 만날 수가 없..)


깃털코치님은 눈치가 꽝인지 아니면

유학파라 한국인 정서를 잘 모르는지

이것이 게르만 스타일인지

갑자기 실내승마장의 라면코치님을 향해 소리친다


-

코치님!!!!!!!

노난 회원님 오늘 실내승마장 가면 안될까요?

여기 진흙이라 힘들어서요!!!

제가 보기엔 잘 타시거든요!!!!!


아익 뭐야???????

가만 있으라고!!!

잘 탄다니 무슨 말이야!!!!!

코치남아!!! 나 책임질 거 아니면 그입 다물라고!?!!

나 지금 되게 어색하다고!!


나의 무언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서 조용히 한마디 한다


-

회원님, 오늘 진짜 잘타셔야 돼요

못타면 다시 원형 올수도 있어요


잘 타긴 뭘 잘타???

어떻게 잘타???

저번에 나 발리는 거 못본거야 뭐야???

좌절한 내가 조용히 답한다


-

곧 다시 뵙겠네요..


그렇게 나는 적진으로 아니 실내승마장으로 향했다

루이의 고삐를 움켜쥐고

열등생의 각오를 불살랐다

오늘은 우등생될 줄 알았는데...


그리고는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앞에 기승자들을 따라서

뛰고 뛰고 또 뛰었다

실내승마장은 생각보다 정말로 컸다

원형 안에서는 고삐를 쥐고 있기만 해도 됐는데

레인이 없이 뻥 뚫린 네모공간인 실내승마장에서는

말의 움직임을 컨트롤하며 방향을 스스로 바꿔줘야 되는데

그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앞에 세마리의 말을 따라가는 것 뿐인데도

루이는 몇번이나 경로를 이탈하고

나는 오른쪽 왼쪽으로 고삐를 잡아당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라면코치님은 오늘은 그냥 따라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라며

아무말도 없다

승마장 내 커다란 거울을 지날때마다

스스로 보면서 자세를 체크하라는데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라면코치님이 바라는 자세가 아니라는 건 알겠다


라면코치님은 무표정이고

저 너머 원형경기장을 보니

깃털코치님이 가끔 흘긋 보며 웃고 있다

와. 진짜.


이거 뭐지?

나 그러니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뭔가

라면과 깃털 사이 어디쯤에서 새우등이 터지고 있는 것 같아

고참과 막내 사이의 줄다리기 어딘가에서

어느 장단에도 맞지 않는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아!


정신없이 50분이 가고

라면코치님이 와서 잘하고 있다는 말을 해줬지만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땀범벅이 되서 내리는데

깃털코치님이 와서 묻는다


-

잘 타셨어요?

-

죽는줄 알았어요.

-

에이. 잘 타시던데요 뭐.


나는 언제쯤 다시 깃털코치님의 코칭을 받을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 라면코치님과 편해질 수 있을까

대충 샤워를 하고 얼얼해진 허벅지를 안고 기어나오는데

머리를 단발로 시원하게 자른 원장님이 인사를 한다


-

3주만에 오셨으니까, 다음에는 4주만에 오시는거 아니죠?


뭐지 이 승마장..

비밀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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