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 워킹홀리데이로 와서 1년이 지났는데 난 여전히 뉴질랜드다. 워킹홀리데이는 기본적으로 1년짜리 비자가 나오는 것이라 나는 애초에 한국으로 돌아갔어야 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비자가 자동으로 3개월 연장됐고 최근에는 남자 친구 덕분에 파트너 워크 비자까지 받았다. 고로 운이 억수로 좋은 나는 2년 더, 이곳에서 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오늘은 이사를 했다. 같이 살던 남자 친구가 모친상을 당하면서 아르헨티나로 돌아갔고 그 후론 둘이 살던 아파트에서 홀로 2달을 더 살았다. 코로나로 국경이 닫혀, 아르헨티나에서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것은 현재 불가능이다. 그가 언제 다시 뉴질랜드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남자 친구는 여기서 살지도 않는데 꼬박꼬박 주마다 15만 원씩 렌트비를 내고 있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돈 낭비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집주인의 배려로 나는 계약 만료 전에 집을 나갈 수 있게 됐고 드디어 오늘은 새로운 집에 들어온 날이다.
핸드폰을 바꿨다.
한국 번호는 정 지지 오래고 폰을 바꾸니 새로 다운로드한 어플을 인증을 해야겠고, 결국 모든 sns를 다 새로 시작했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에 남겨진 나의 세계여행 사진들은 버릴 수 없어, 언제 한번 시간을 내서 정지된 한국 번호를 살려야겠다고 다짐했다. 핸드폰을 바꾸면서 연락처 목록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저장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했다. 2020년 디지털 시대에 연락처 연동하나 못해서 손수 번호를 꾸욱 꾸욱 누르고 있다.
최근에는 하던 일도 바꿨다.
5개월 넘게 일해왔던 레스토랑을 그만둔 이유는 인도인 주방장과의 마찰 때문이었다. 불량한 나의 업무 태도로 곱지 않은 시선까지는 이해했지만 상대방을 모욕하고 자기 아랫사람으로 무시하시는 꼬락서니는 더는 볼 수 없었다. 나보고 일에 흥미가 없으면 알려달라는 말에. 응 관둘게.라고 답했다. 이대로 그냥 나올 사람이라면 내가 아니지. 또 한바탕 했다. 평소 조금 친하다고 생각했던 다른 인도인 셰프에게 연락을 해서 이런 일이 있었다며 하소연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자기한테 그러지 말고 2주만 참고 그냥 나가는 게 제일 좋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일을 관두기 최소한 2 주전에 통보를 해 주는 것이 이 나라 근로법의 일부라고 하는데, 나는 2주씩이나 인도인 주방장을 보느니 근로법을 어기고 법원에 갈 요량이었다. 다행히 레스토랑 주인과 이야기를 잘 마치고 적절한 타협점을 찾았다. 인도인 주방장 얼굴을 보지 않고 2주 더 일을 하는 조건이었다. 일을 관두는 시기에 마침 한국 식당 홀서빙 일을 구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미련 없이 인도인 주방장과 헤어질 수 있었다.
비자가 바뀌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1년 2개월째, 나는 두 달 전 신청했던 파트너 워크 비자를 드디어 받았다. 생각보다 일찍 받아서 놀라움, 앞으로 2년을 더 뭐하고 살아가야 하나 걱정스러움, 뉴질랜드에서 좀 더 머물 수 있다는 안도감 등 여러 감정이 혼재된 상태다. 비자만 바뀌면 모든 게 다 잘 풀릴 줄 알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받던 설움을 드디어 풀 수 있을 거라고 한껏 들떴었다. 하지만 막상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영어 공부부터 하자. 영어 점수가 있어야 뭘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끊임없이 크고 작은 것들이 변화하고 있다. 인생이 쉬운 줄 알았다. 그냥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산지 몇 해가 지났다. 처음에는 그냥 워킹홀리데이 1년 아르바이트나 하고 영어 연습하면서 살아보자 한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목표했던 1년이 지났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
산 넘어 산이라고, 대학교만 가면 되는 줄 알았다. 졸업하고서는 취직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퇴사를 하고서는 세계여행만 떠나면 되는 줄 알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워킹홀리데이만 시작하면 되는 줄 알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만료가 되자, 파트너 워크 비자만 받으면 뭐든 다 될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것도 되는 게 없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 여행을 하고 나니 돈이 떨어졌고, 돈이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실 돈은 있다. 이 돈을 어디에 써야 기가 막히게 잘 썼다고 할까 생각 중이다. 그렇다고 돈이 많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은 적도 아닌 듯하다. 이도 저도 아닌 나의 재정상태처럼 나도 지금 내 인생 어디쯤 이도 저도 아닌 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하고 모두가 이런 걱정을 하겠지. 너나 나나 다 똑같으니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당신에게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를 너무 의미 있게 새겨 읽진 말길 바란다. 다만, 나의 이야기들을 통해 이런 방법도 있구나,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정도 재미있는 인생을 도전하는 것에 힌트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두가 부러워할지도 모르는 해외에서의 삶. 한국에 머물 사람들에게는 한 없이 허황되고 비 현실적인 이야기. 하지만 한국을 벗어나고 싶거나 떠날 용기가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극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이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