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생활은 즐겁다. 1학년 때는 인체의 신비를 배우며 열심히 공부했지만 2학년이 되고 전공 수준이 확 높아지면서 교수님의 설명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게 됐다. 그렇게 학업과는 점점 멀어져 갔고 대학병원 취직은 애당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래도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경청하고 필기도 하며 수업은 열심히 들었지만 이해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교수님의 책 읽는 소리는 소귀에 경 읽기가 되어버리곤 했다. 결국, 공부와 인연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 후, 학업이 아닌 점점 대외 활동에 더욱 집중하게 되면서 학교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대학교 1학년 때 혼자 내일로 기차여행으로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사는 이 땅이 생각보다 꽤 넓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이를 계기로 다양하고 재미난 일들에 도전하기 시작했고 대학생을 위한 혜택을 4년만 받고 끝내기가 너무나 아쉬워 대학교 2학년이 끝난 후 휴학을 하여 본격적으로 대외 활동에 집중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학생 신분을 갖고 있으면 생각보다 꽤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미술관, 박물관, 내일로 기차 등 학생 할인부터 시작해서, 각종 기업에서 진행하는 대학생 대상 전액 지원 해외 봉사, 각종 기자단과 이벤트까지 참여할 수 있다. 내가 방학마다 했던 일은 '스펙업'이라는 네이버 카페에서 정보를 얻고 정부나 공공기관, 기업의 지원을 받아 각종 대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여성가족부 '꿈과 사람 속으로' 인도 해외 봉사, 한세실업 베트남 해외 봉사, 한국 청소년 코오롱 오지 탐사대, 대학로 문화 축제 스텝 등으로 참여하면서 대학 생활 내내 방학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휴학해서 시간은 많았지만, 돈이 없었다. 대외 활동을 하고 싶어도 면접을 보러 서울에 가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고 교통카드를 충전하려면 내 지갑에 단 몇 푼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렇게 돈을 많이 준다는 대형 마트에서 커피와 와인 시음 판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한 달에 150만 원도 못 벌었지만, 차비와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었기에 나름 행복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던 어느 날, 코오롱 스포츠에서 후원하고 대한 산악연맹에서 주최하는 '코오롱 오지 탐사대' 선발 모집을 발견했다. 이미 작년에 서류에서 빛의 속도로 탈락하는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조금 더 정성을 담아 포트폴리오를 작성하고 서류 지원을 했다.
다행히 서류에서 합격했고 2차 체력테스트 및 면접을 보러 한국 체육대학교에 간 날, 서류전형을 통과한 500여 명의 예비 오지 탐사대원들은 오래 달리기, 오래 매달리기, 윗몸일으키기 등 체력테스트와 구술 면접을 보았다. 16명인 우리 조원 모두가 오래 달리기 테스트를 위해 한 번에 다 같이 뛰기 시작했는데 나는 맨 뒤에서 2번째로 간신히 최저 합격선을 통과했다. 다른 종목에서도 그리 높은 기록을 내지 못한 나는 체력테스트에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이미 합격과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체력테스트 직후 면접을 보기 전,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 체육 관련학과 학생들이거나 대학 산악부원들이었고 그들과 함께 달렸으니 꼴찌에서 2등을 한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면접을 아무리 잘 봐도 소용없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비운 채 나를 포함한 5명이 면접을 보러 한 방에 들어갔다. 면접관은 총 4명이었는데 우리가 말할 때마다 종이에 뭔가를 적으며 즉석 평가를 하는 것 같았다. 내세울 것도 없고 이미 체력테스트는 맛있게 말아 드셨지만 그래도 이 전에 해온 수많은 대외 활동에서의 면접 경험 덕분인지 질문마다 청산유수처럼 대답할 수 있었다. 다른 운동하는 친구들처럼 산행이나 운동 경험은 많지 않았지만, 작년에 대학 동기들과 제주도 한라산을 눈 오는 겨울에 다녀왔던 경험을 살려, 산을 사랑하는 아이로 잘 포장하여 대답했고 자신감 넘치는 말투와 온화한 표정으로 면접관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합격이라는 일말의 기대가 없었기에 면접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 원래 하던 아르바이트나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당연히 떨어졌다고 생각했던 2차 테스트에 합격했다며 3차 '아웃도어 리더십 테스트'에 참여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세상에나, 나중에 알고 보니 체력테스트를 아무리 잘 봐도 면접을 못 보면 떨어질 정도로, 2차 테스트는 체력보다는 면접이 훨씬 중요했다. 3차는 2차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추후 각 팀의 산악대장이 될 전문 산악인들과 함께 2박 3일 산행을 함께 하는 일정이었다. 2박 3일간 같은 조끼리 함께 산행하면서 협동심, 리더십, 그리고 산행 스타일을 면접관들(산악대장들)이 관찰하고 점수를 매긴다.
태어나서 2박 3일간 산을 타본 적이 없을뿐더러 산속에서 텐트와 침낭을 펴고 잠을 잔다는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게 곧 지옥의 첫 번째 훈련이 될 줄은 몰랐다. 3차 산행 테스트 날 아침, 한국 체육대학교에 모인 2차 합격자들. 조원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대형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3시간이 지나 버스는 아침 일찍 모여 피곤했던 참가들을 강원도 어느 산자락에 뱉어냈다. 어젯밤에 부랴부랴 어머니의 등산화, 스틱, 등산복을 빌려 내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만약 최종 합격을 하면 그때 가서 내 발에 맞는 등산화를 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헐거운 등산화 끈을 꽉 조였다. 오전 9시, 행동식이라 불리는 초콜릿과 에너지바, 텐트, 식량 등이 조원들 모두에게 고루 분배되었고 그 무거운 가방을 들쳐 멘 후 마침내 지옥의 문이 열렸다.
이번 산행을 총괄하는 강사님이 산행 일정에 대한 설명과 기본적인 유의사항을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조원들과 서로 통성명을 나누었고 산행 테스트의 합격 기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면접관인 산악대장님과 강사님의 주관적인 견해가 합격 여부를 결정할 수 있으며 협동심과 체력은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어있어야 했다. 구체적인 평가 기준을 알 수가 없다 보니 합격을 열망하는 참가자들은 산행 내내 너도나도 솔선수범에 옆 사람을 도와주는 천사가 되었다. 나는 이 세상이 이렇게 따뜻하고 배려와 양보가 난무하는 곳이었는지 몰랐다. 산행 테스트가 아니라 마치 협동심 뽐내기 자랑 대회를 보는 듯했다. 그러나 산행이 진행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천사 모드를 더는 유지할 수 없었고 피곤하고 배고픈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성격들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리더를 자처했던 오빠는 매사 본인이 리더가 되어 일했고 자기가 이미 다른 대외 활동도 많이 해봐도 잘 안다는 식으로 자주 말하고 다니더니 결국 최종탈락하고 말았다. 본인의 경험을 뽐내기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던 사람들은 합격했고 산악 경험이 많아 산 지리에 능했던 참가자들, 혹은 응급상황을 대처해줄 특출 난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합격했다.
우리 조에는 물리치료학과 학생이 나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 나와 달리 그 친구는 3차 산행 테스트를 위해 본인이 직접 챙겨 온 테이핑으로 사람들을 보살피는 열정을 뽐내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면접관이라도 만약 우리 조에서 물리치료학과 학생을 한 명이 뽑힌다면 저 친구를 뽑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비우고 점점 합격에 대한 희망보다는 그저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즐겁게 산행을 하려고 노력했다. 특출 난 재주는 없었지만, 길목에 놓인 나뭇가지를 치우거나 남보다 부족한 체력을 만회하기 위해 행렬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묵묵히 걸었다. 그러던 중 테이핑을 갖고 왔던 물리치료학과 친구가 제대로 퍼져버렸다. 가방이 너무 무거웠는지 맨 뒤에 처져서 결국 주저앉고 만 것이다. 팀원들은 그녀를 도와주겠다며 그녀의 배낭 가방 속 물건들을 대신해서 들어주길 자처했고 우리는 그게 협동심이라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전체적인 그림은 좋았지만, 본인의 짐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던 그 친구는 결국 최종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3차 테스트가 끝난 후 나는 물리치료학과 학생으로서 보여준 재능도 없었을뿐더러 체력도 좋은 편은 아니라서 팀원들을 끌어주지도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탈락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다시 마트로 돌아와 여느 때처럼 커피를 팔며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했다.
"새로 나온 우유 커피입니다. 맛보시고 가세요! “
며칠 후, 마트에서 여느 때처럼 커피 시음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급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으러 후방 창고로 갔다. 함께 3차 산행 테스트를 했던 같은 팀 용현 오빠였다.
"너, 최종 합격했어! 홈페이지 명단 확인해봐! “
최종 명단을 확인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결국 밑창이 터져버린 오래된 어머니의 등산화를 버리고 집으로 오면서 그저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했다. 내년에 준비를 잘해서 다시 도전해야겠다 다짐하며 거의 맨발 투혼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2박 3일의 산행 테스트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3일이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평지를 걸어본 적도 없는 내가 오르락내리락 산을 타면서 내 몸 하나 지키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우리 팀원들 한 명 한 명과 대화를 하려고 부족한 체력을 견디며 빨리빨리 걸어 다녔다. 설거지나 텐트 치고 접는 일들도 내 할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가서 도와주었고, 체력이 좋지 못해 앞에서 끌어주진 못했지만 힘들어하는 친구를 뒤에서 밀어주곤 했다.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수능을 끝내고 나오던 그 순간보다 더 짜릿하고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기뻤다. 그땐 그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되리라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인생에 가장 값진 행운은 누구에게나 살면서 한 번씩 찾아온다고 믿는다. 나에게는 그 황금열쇠가 바로 오지탐사대였다. 그게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