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세계여행을 가기 위한 준비만 한 달이 걸렸다. 정보 수집, 여권 갱신, 예방 접종, 국제 운전면허증, 비행기 편도 예약, 숙소 예약, 신용카드 발급, 영어 공부, 필요한 물품 구매 등, 일을 그만두고 더 바빠진 느낌이다. 출국하는 날, 아버지가 공항까지 데려다주셨는데 전날 새벽까지도 빠진 것이 없는지 계속 확인하느라 설레는 마음으로 밤잠을 설쳤다. 드디어 비행기가 발리를 향해 출발했고 창문 밖으로 점점 작아지는 한국을 보면서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긴장이 되었다. 가족이나 친구 하나 없이 이렇게 혼자 비행기를 타는 것이 태어나 처음이라 괜히 옆 사람에게 말도 걸어보고 일기도 써보면서 긴장을 달랬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여행의 첫걸음이 되는 여행지라 출국 전에 정말 많은 준비를 했는데 우선 11일간 봉사활동을 먼저 한 후 일주일 가량 발리 여행을 하는 일정으로 짰다. 핸드폰 유심칩 구매부터 봉사활동 장소까지 이동 버스노선 체크 등 미리 한국에서 전부 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공항에 막상 도착하니 우왕좌왕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는 발리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더운 열기와 열대 나무 냄새가 내 코를 먼저 반겼다. 침낭과 신발이 주렁주렁 달린 75L 배낭 가방을 메고 돈을 아끼기 위해 택시도 타지 않은 채 30분을 걸어 1박 할 호스텔에 도착했다. 호스텔로 걸어가는 길에 호객행위를 하는 남자가 나를 졸졸 따라오면서 숙소 예약을 했냐고 묻는다.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말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숙소 앞까지 따라오다가 내가 호스텔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제야 돌아간다. 귀찮게 하는 남자와 함께 걸으면서 더운 날씨까지 더해져 등에서는 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4인 공용 침실 방에 가방을 대충 풀어두고 배가 고파 홀로 밖으로 나왔다. 분명 새벽같이 한국 집에서 출발해 공항으로 왔는데 어느새 하루가 다 가고 낯선 곳에서 처음으로 어두운 저녁을 맞이했다. 호스텔 주변 허름한 식당 구석에 앉아 내가 지금 정말 발리에 와 있는 것이 맞는지 실감이 안 났다. 이미 여행은 시작됐고 앞으로는 모든 결정은 내 스스로 내려야 한다. 불안감보다는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했다. 달걀 볶음밥을 시켰는데 가격이 저렴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음식이 맛있어서였는지 매우 만족스러운 저녁 한 끼를 때울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봉사활동 미팅 장소까지 버스를 타고 혼자 이동하는 길이었다. 저렴한 시외버스를 탔는데 문은 닫히지도 않고 시설이 낡아, 가는 내내 시끄럽게 덜컹거렸다. 내 앞에 앉은 젊은 여자는 왠지 나와 같은 봉사활동 참가자 같아서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날이 너무 덥고 피곤해서 그냥 포기해버렸다. 그렇게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눈을 감고 1시간 넘게 이동한 후 드디어 미팅 장소에 도착했다. 그 여자는 내 예상대로 같은 팀 참가자였고 우리 외에도 어려 보이는 흑인 여자, 그리고 한국인처럼 생긴 여자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통성명을 한 후 봉사활동 팀 리더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약속된 시간보다 모두 일찍 도착해서 리더가 오히려 늦게 오는 느낌이었다. 참가자는 4명으로 한국인 두 명, 프랑스인 한 명, 베트남인 한 명, 그리고 리더였던 인도네시아인까지 총 5명이었다.
발리섬 서쪽에 있는 네가라(Negara)라는 지역에서 앞으로 11일간 머물 예정이다. 우리가 할 일은 중학교에 가서 영어를 가르치고, 다섯 명이 같은 집에 살면서 인도네시아 발리 지역 문화를 체험하고 서로 문화교류를 하는 것이 이번 봉사활동의 목표였다. 그중 리더 프랏냐(Pradnya)라는 친구와 한 방을 같이 썼다. 낮에는 항상 히잡을 쓰고 다녔는지만 집에서는 히잡을 벗고 다녔기에 그녀의 길고 고불고불한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굉장히 신실한 친구라 아무도 보지 않고 신경 쓰지 않아도 하루에 꼭 3번씩 기도를 드리곤 했다. 또한, 한국 드라마, 한국 가수들을 좋아해서 한국말을 조금씩 하곤 했는데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아이, 언니 뭐야!~' '어떻게~!' '진짜?' '이민호 오빠 좋아' 등 적재적소에 찰떡같은 한국말로 대답을 했다. 우리는 같은 방을 쓰면서 같이 유튜브를 보거나 손빨래를 하면서 유독 더 친해졌고 개그 코드가 비슷해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곤 했다.
여태껏 해본 봉사활동 중에 가장 미흡하고 불완전한 프로그램이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일단 첫날 학교에 방문했을 때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뭘 가르쳐야 할지 도대체 수업에 들어가서 어떤 걸 해야 할지 누구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교무실에 앉아서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지 바로 그 자리에서 급하게 정하다가 일단 기본적으로 영어를 가르치기 위함이 우리의 목적이었기에 들어가는 반마다 영어 동요를 같이 부르고 영어 퀴즈를 풀어보자며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아이들은 한국 음악이나 한국 드라마 덕분에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지나갈 때마다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쳐주었다. 그러다가 내가 같이 손 인사를 해주거나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기라도 하면 수줍은 얼굴로 부끄러워 내 눈도 못 마주치곤 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팀에 있던 다른 한국인 제인(Jane)은 얼굴이 예뻐서 더 인기가 많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면서 이곳 생활에 익숙해져 갔고 프로그램도 조금씩 정비가 되고 현장에서 학생들과 다양한 활동을 함께하면서 조금씩 그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작은 행사를 치르는 자리에 우리 봉사 멤버들이 초대되어 참석하는 날이었다. 우리 팀원 다섯 명은 맨 앞자리에 앉아있었고 교장 선생님의 인사말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두 명의 여학생이 인도네시아 발리 전통춤을 추면서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들의 손을 잡아끌어서 무대로 불러내기도 했다. 나는 당연히 인도네시아 전통춤을 모를뿐더러 평소에도 춤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나가서 박수만 치다가 돌아왔는데 그것마저 큰 박수로 격려해주던 아이들이 너무 고마웠다. 봉사활동이 끝나기 하루 전날,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학생들이 우리 숙소에 찾아왔다. 아이들은 우리와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렸고 우리도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내가 비록 한국의 유명인은 아니었지만 그만한 인기를 느끼게 해 주고 항상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주던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발리에서의 11일간 봉사활동은 너무 편안하고 즐거웠다. 헤어지는 날 버스에 먼저 올랐고 우리를 보내주는 리더 프랏냐에게 잘 가라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또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에,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손만 흔들었다. 네가라에서 발리 중심부로 다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창틀에 올려놓은 오른쪽 아래팔이 햇볕에 타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시골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시작한 나의 세계여행이 어쩌면 항상 행복한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가 또 헤어질 때는 똑같이 이렇게 계속 슬프고 힘들겠구나 싶었다.
봉사활동이 끝나고 힘든 이별을 한 후 발리섬 중심으로 돌아왔다. 나랑 같이 봉사 활동했던 한국인 친구 제인과 꽤 괜찮은 호스텔에 숙소를 정한 후 같이 여행을 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예쁘다고 알려진 스타벅스에 방문하거나 시장에 가서 값싸고 맛있는 망고스틴을 한 봉지씩 사서 마음껏 먹었다. 하루는 내가 음식을 너무 많이 먹는지 소화불량으로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제인은 자기도 예전에 그런 적이 있다 말하면서 내게 바늘이 있냐고 물어왔다. 그럴 때는 바늘로 손끝을 따줘야 내려간다며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제인의 표정이 무서워서 절대 그렇게는 못 한다고 저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운 더 심해졌고 결국 제인에게 제발 내 손을 따 달라고 부탁했다. 제인은 나의 엄지손가락 끝을 실로 동동 여며 감 더니 바늘로 사정없이 찔러댔다. 속으로 '네 손 아니라고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찌르기냐?'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낫게 해 준다니까 꾹 참았다.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찔렸을 때 피가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반대쪽 손가락을 실로 여미어서 바늘로 또 한 번 사정없이 찔러댔다. 그러나 계속 피가 나오지 않는 이상 현상이 반복됐다. 제인은 심하게 체하면 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 아무래도 손가락 열 개를 다 따야겠다고 말했다. 이젠 죽이 되는 밥이 되든 제발 아프지만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면서 다른 손가락도 다 따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바늘로 무참히 찔린 손가락에서 검은 피가 나오기 시작했고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체기가 가라앉았다. 그 후로 이날 사건을 계기로 심하게 체할 때마다 내 손을 스스로 찌르는 것에 도사가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자가 치료법도 하나둘씩 배워 나가기 시작한것이다.
다음날, 우리는 꾸다 해변에 서핑을 배우러 출격했다. 서핑하기에 안성맞춤인 파도와 물 온도, 동시에 가격이 저렴해서 많은 서핑족이 찾는 곳이 바로 발리라고 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스포츠였지만 제인의 제안 덕분에 우리는 함께 꾸따 해변으로 나섰다. 장사꾼들이 줄지어 해변에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고 1시간 강습, 그리고 2시간 자유 시간에 15만 루피아를 부르는 아저씨네서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약 1만 5000원 정도 되는 가격이었는데 3시간에 15,000원이면 꽤 괜찮은 가격인 거 같아 결정했다. 하지만 막상 알고 보니 우리 같은 초보들에게 자유 시간은 있으나 마나 한 시간이었다. 왜냐면 우리 둘 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술도 없고 자세도 정확하지 않아 자유 시간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상술이었음을 자유시간 2시간을 1시간 만에 끝내고 제 풀이 지쳐 숙소로 돌아오면서 깨달았다.
처음에는 꾸다 해변 중심부에서 타다가 둘 다 너무 못 타서 파도가 조금 더 잔잔한 가 쪽으로 이동했다. 가 쪽은 파도가 약한 대신, 물 위의 쓰레기들이 밀집되어 둥둥 떠다니고 있어고 바닷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쓰레기들을 양손으로 치우며 걸어야 했다. 물 위에는 일반 쓰레기들부터 속옷, 생리대, 콘돔 등 정말 해괴망측한 것들이 다 섞여 있었다. 처음 서핑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수도 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밀려오는 파도 때문에 물을 먹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쓰레기장 속에 있는 걸 알면서도 초보였기 때문에 넘어지고 물을 먹으면서 연습을 해야 했다. 그러나 사건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그렇게 2시간 정도 수업과 연습을 한 후,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쳐 숙소에 돌아왔다. 샤워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제인이 갑자기 몸이 가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제인의 팔을 보니까 온통 두드러기처럼 알레르기들이 올라와 있었고 얼굴과 목까지도 벌겋게 달아 올라와 있었다. 더러운 물을 마신 상태로 강렬한 자외선에 노출되어 피부가 뒤집힌 듯했다. 다행히 나는 팔이 긴 래시가드를 입고 있어서 많이 타지 않아 괜찮았지만, 제인은 시간이 갈수록 통증이 더 심해졌고 결국 택시를 타고 근처 병원으로 이동했다. 제인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래도 전직 물리치료사였던 나는 발리에 있는 병원에 간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새로운 경험이라 기대감에 가득 차 제인이 의사와 상담을 하고 치료를 받는 동안 나는 병원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했다. 시설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병원에 있는 사람들의 형상이 다르니 병원 전체가 새롭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치료 상담을 받고 나온 제인은 햇빛 알레르기 같다는 진단을 받았고 연고를 사서 그날 이후부터 매일 상처에 발랐다. 내 생각에는 햇빛이 너무 강해서 문제이기도 했지만 각종 더러운 오물 물을 먹었기에 더 상태가 안 좋았던 것 같다. 어쨌든 아쉽지만 그 후로는 서핑을 못 했다는 안타까운 후문이다.
서핑 소동이 있은지 며칠 후, 우리는 뜨랄랑가에 가서 멋진 경치를 보며 밥을 먹었다. 이색적인 발리의 논밭 풍경을 바라보며 먹는 밥은 산해진미였다. 산속이라 인터넷 데이터 수신이 잡히지 않아 숙소로 돌아가는 고젝(콜택시)을 부르지 못해 할 수 없이 터벅터벅 걸어서 내려가던 중 지나가던 고젝 기사가 우리를 시내까지 태워주기도 했다. 우리는 억수로 운이 좋다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스타벅스에 들러 산들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하시면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가 두 눈을 감고 조용히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마치 꿈속에 있는 듯한 기분으로 짧은 낮잠을 자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망고스틴을 부족함 없이 저렴하고 맛있게 먹었고, 꾸따 해변에서는 살면서 지금껏 본 중 가장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일몰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 일몰을 바라보다 문득 발리에서 지낸 시간 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이 전부 꿈만 같았다. 이제야 사람들이 발리로 신혼여행을 왜 많이 오는지 그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일상적인 반복 속에서 사랑과 행복을 간과한 채 무감각해진 삶을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또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하며 그 속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며 더욱 성장한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발리 꾸따 해변에의 아름다운 노을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인도네시아의 뜨거웠던 겨울, 맛있었던 마르따박, 잊지 못할 친구들 그리고 학생들과의 추억. 사랑에 빠질 것 같은 곳. 발리에 다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