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뉴질랜드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갖고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비자 신청 시작부터 억수로 운이 좋았다. 비자 신청을 하던 그날 아침, 매년 경쟁률이 높아 3000명 선착순에 들지 못해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던 터라, 아버지 등판에 노트북, 사전에 미리 인쇄해온 시뮬레이션 자료들을 한 가득 든 채 데이터랑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송신 기지국으로 향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거리에 전깃줄이 다 사라졌지만 송신기 전봇대에는 각종 전기 두꺼비들과 전깃줄이 뒤엉켜져 있었다. 그 주변에 있는 쇼핑몰 입구 한편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에 스타벅스 와이파이를 연결했고 내 것, 아버지 것 해서 2대의 핸드폰까지 데이터를 켜서 뉴질랜드 이민성 사이트에 연결한 후 비자 오픈 시간만을 기다렸다. 오전 7시, 시작과 동시에 비자 신청 버튼을 눌렀지만 듣던 대로 수백만 수천만명의 지원자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탓에 페이지가 넘어가지도 않고 하얀 배경화면에서 멈춘 후 그렇게 버퍼링이 걸렸다. 1시간 사투 끝에 노트북으로는 너무 느려서 결국 실패했고, 그나마 가장 최신 기기였던 아버지 핸드폰에서 지원 완료를 할 수 있었다.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동시에 1시간 만에 지원이 완료된 것이 꽤나 이상했다. 왜냐면 작년에 지원했던 친구는 7시간이나 걸려서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그 어렵다는 비자를 손에 쥐게 되었고 조속히 출국 준비에 나섰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정확한 요인은 알 수 없으나 몇 해 전 있었던 크라이스트 처치 지진과, 작년에 있었던 뉴질랜드 총기난사 사건의 영향으로 지원자 수가 확 줄었고 그로인해 손쉽게 비자 신청을 1시간 만에 완료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20년 6월,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만료되는 시기였다. 2020년을 송두리째 앗아간 코로나 바이러스는 20년 초에 발발했고 뉴질랜드는 발 빠른 대응으로 3월부터 전국 봉쇄령을 내렸다. 2월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남자 친구와 나는 새로 이사 간 집에서 이사한 지 한 달도 안되어 발목이 묶이게 된 셈이다. 간단한 산책을 제외하곤 밖으로 외출하는 것 조차도 어려웠기에 때문에 원룸만 한 방에서 둘이 함께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뉴질랜드 정부차원에서 올해 중순에 워홀 비자가 만료되는 사람들을 위해 3개월 자동 비자 연장을 해 주었고 덕분에 따로 복잡한 절차 없이 나의 워홀 비자 만료는 20년 9월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던 중 6월에 남자 친구의 어머니가 별세하시고 남자 친구는 급하게 특별 항공기를 이용하여 불가피한 출국을 하게 되면서 그다음 달이었던 7월, 혼자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금전적으로 부담이 돼, 혼자 살 플랫으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살 적에 파트너 비자를 꾸준히 준비해온 결과 6월 초, 남자 친구가 출국하기 하루 전, 이민성에 파트너 워크 비자를 재신청했다. 사실 한 달 전에 신청했던 것이 증빙자료가 부실하다 하여 반려되었기에 자료를 보충하여 재 신청을 했던 것이다. 2개월밖에 워홀 비자 만료가 남지 않은 상황에서 파트너 비자가 그 안에 나오지 않는다면 중간에 붕 뜨는 시간이 발생하게 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한 달 만에 초고속으로 비자가 나왔고 그렇게, 22년까지 머무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년짜리 워홀 비자를 연장시키는 방법은 크게 4가지가 있는데 첫째, 농장에서 3개월 일하고 워홀 비자 3개월 연장하기. 둘째, 일하는 곳에서 사장으로부터 워크 비자를 받아 1년 이상 연장하기, 셋째, 뉴질랜드에서 이미 워크 비자를 받아서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파트너 비자를 받아서 파트너의 남은 비자 기간에 맞춰 비자 연장하기. 넷째, 뉴질랜드 시민권자 혹은 영주권자로부터 파트너 비자를 받아 뉴질랜드에서 시민권자 혹은 영주권자가 되기. 사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능동적으로 본인 스스로 노력에 의한 연장이고 세네 번째 방법은 수동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방법이다. 목표한 바는 전혀 없지만 우연한 기회로 워크 비자로 뉴질랜드에서 일하고 있던 외국인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서로의 관계가 깊어져 결국 이 친구를 통해 파트너 워크 비자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딱히 기술이 없어서 뉴질랜드에 오자마자 했던 일은 호텔 청소일이었다. 화장실 청소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못 이기고 3개월 만에 일을 그만두었다. 워홀 비자로 머물 수 있는 남은 시간은 약 9개월. 무슨 일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백수로 지내던 찰나, 시기가 좋아 어머니를 모셔 남섬 여행을 한 달가량 함께했고, 호텔에서 3개월 동안 벌었던 돈을 여행에 다 쓰게 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시고 그 후로도 2개월간 일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시간을 보냈다. 워홀 비자는 금방 일을 관두니까 안 쓴다는 고용주들이 많아 속상했지만 난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 2,3시간씩 차도 없이 걸어 다니며 카페란 카페는 전부 돌아다니며 CV를 내고 다녔고 매일 인터넷으로 새로운 일을 찾아보는 것으로 하루를 쓰곤 했다. 청소나 설거지 같은 일이 싫어서 카페나 레스토랑 일을 알아보고 다녔던 것인데 이 마저도 내겐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백수 생활 3개월 만에 파산할 지경에 이르자 나는 페이스북에서 급하게 식당 설거지 주방일을 하는 잡을 신청 했다. 별다른 면접도 따로 없이 가자마자 직원이 내게 고무장갑을 건내었고 그자리에서 바로 그냥 설거지를 시작했다. 이렇게나 쉽게 일을 시작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5개월간 설거지 일을 하면서 나름 재밌게 잘했다. 저녁 식사도 제공해주어 맛있게 먹었고 차비를 아끼고자 전동 스쿠터를 하나 사서 매일같이 40분씩 스쿠터를 타고 집에서 식당을 왔다 갔다 했다. 비가 오나 밤이 늦나 어김없이 스쿠터를 타고 다녔고 바람을 가르며 타는 그 기분이 딱히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주방장과의 마찰로 결국 일을 관두게 되었고 그 후 운이 좋게도 곧 바로 한인 잡을 잡을 수 있었다. 기술도 없는데 한 직장에서 1년 넘게 일한 곳도 없어 워크 비자를 받는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영락없이 9월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남자 친구 덕분에 비자 만료일을 연장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뉴질랜드와의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파트너 비자가 나온 후부터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워홀 비자로 지냈던 1년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편하고 안정적으로 변해갔다. 일일 찾는 것도 예전보다 수월해졌고 수입이 생겨 저렴한 중고차를 샀으니 더 이상 40분씩 정동 스쿠터를 타고 통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새로 지은 따뜻한 플랫 집에서 깨끗한 방을 혼자 넓게 쓰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뉴질랜드인 친구들도 사귀어서 정말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정작 이 모든 행복을 가능하게 해 준 주인공인 남자 친구만 곁에 없을 뿐. 오히려 함께 붙어 있지 않으니 싸우는 횟수도 줄어들고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져 서로 이해하려 노력한다.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미세먼지와 결혼, 집, 육아, 직장 스트레스 없이 이렇게 평온하고 자유롭게 살아본 적이 있던가. 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행복하다. 이제, 내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뉴질랜드가 왜 그렇게 좋은 곳인지 일상을 기록해보려 한다. 많은 돈과 내 집, 결혼과 아이가 없어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지금부터 차례차례 이야기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