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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노 Aug 24. 2018

태풍 솔릭에 가게가 침수되어 버렸다.

야생의 땅 제주도

1편은 https://brunch.co.kr/@nonayo/125 에서

제주살이 1편을 사진 복사 오류로 급하게 마무리했는데, 다음 메인에 올라 과분한 관심을 받은 것 같다.

다들 제주 이민이 실제로는 어떤지 매우 궁금해하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로망을 적은 것이 아닌데 로망으로 느끼는 부분도 있으신 것 같아 신기했다. 아무튼 이번 편은 제주도에서 첫 태풍을 맞이해본 자영업자의 일기가 될 것 같다.



가게의 평소 모습

빵집 일은 매우 바빠서, 더구나 피크닉델리는 거의 1인 빵집을 표방하는 곳이니만큼 글을 적는 것도 무척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래서 어제 태풍 솔릭이 제주도를 강타하기도 하고, 태풍 때는 밖에 나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장사도 못하니까 글이나 적어야지 했는데.



가게가 침수되었다.


 가게가 침수돼서 물을 퍼내느라 글을 적는 게 늦어졌고 가구가 일부분 젖어서 옮기느라 장사 밑천들이 모두 뒤섞여 있으니 내일 장사는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기회에 그동안 엄두를 못 냈던 가구 위치도 옮기기로 계획하고 우선 침수된 곳을 잘 말리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겸사겸사 글을 적어본다.




태풍 전날


서울에 살았을 때는 태풍이 온다고 해도 위험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저 며칠 조금 외출을 줄이면 끝나는 게 태풍이라 생각했고 뉴스에 나오는 침수, 실종, 파손 등의 사건은 있는 줄은 알았지 심각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제주도에서도 그냥 열심히 문 열고 장사하면 되는 줄 알았지.

그런데 태풍 전전날부터 손님이 꽤 오시기 시작했다. 화요일에는 그냥 사람이 많구나 했는데, 알고 보니 태풍 전에 태풍 때 이동 못하는 걸 염두해서 간식이나 먹을 것들을 좀 더 사두시는 거였다. 태풍 전날이 장사가 제일 잘 될 줄이야! 태풍의 조짐이 느껴지는 수요일에는 장사를 할까 말까 하다가 늦게 준비를 시작했는데 태풍 직전에 빵을 사러 엄청 많은 손님이 오셨다. 조심스럽게 원래 태풍 전에 이렇게 장을 보시냐고 물어봤더니.


"육지분이시죠? 제주도 태풍은 장난이 아니에요. 며칠씩 못 나올 수도 있으니까 조금씩 다 사둬야 해요."
바람이 강하고 날이 흐리다.


태풍 전날이 장사가 잘되는구나 하는 깨달음 속에 가게 밖의 기물을 싹 거둬 가게 화장실에 넣어두고 차도 안전한 주차장에 주차해놓았으니 별일이 없으리라 낙관적으로 예상하며 내일은 푹 쉬어야겠다 하고 잠이 들었다.

저녁에 게임을 하겠다며 옆동네 삼화에 나갔던 남편이 피시방이 정전돼서 새벽에 돌아왔다.

잠결에도 조금 꼬소했다.




태풍 당일


우리 동네 전봇대가 쓰러졌다!


창 밖의 빗소리와 건물에서 빗물이 흐르는 소리, 바람 소리가 요동치는 밤이 지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단톡방에 아침에 잠깐 정전이었는데 다들 괜찮냐고 묻는 카톡이 와 있었다. 새벽에 갑자기 밥솥이 혼자 말을 하길래 전기가 나갔다 들어왔나 하고 생각했는데 진짜 정전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걱정했던 냉동고가 다 녹을 정도로 긴 정전은 아니어서, 냉장고와 냉동고에 들어있던 재료들은 무사했다.


급하게 글루건으로 막아보았지만...


아침에 있는 단체 주문건을 챙길 겸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바람과 비가 정말 심했다. 길가에 있는 도로 표지판이 강한 바람에 끼익 거리며 엄청 흔들리는 걸 보고 급하게 가게로 들어갔다. 1분도 밖에 있질 않았는데 우비가 홀딱 젖었다. 가게 안은 그와 정반대로 평온해서 안심하고 가게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폴딩도어 아래에 물이 고인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쪽에 놓아두었던 종이 박스들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무 선반 아래로도 물이 스미고 있었다. 침수를 확인하자마자 우선 젖으면 안 되는 박스를 걷어내고 급하게 집에서 자던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비몽사몽한 상태로 옷을 꿰어 입고 내려왔는데, 넘치는 물을 보자마자 정신이 들었는지 급하게 물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주방 안까지 물이 들어찼다. 폴딩도어 바깥 강수량과 바람의 콜라보레이션

침수돼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삼양일동 랜드마크 은호상회 뒤쪽 전봇대가 뽑혔다는 카톡이 날아왔다. 심지어 바로 연합뉴스에도 나갔다고. 삼양동의 전봇대와 태양광 패널의 파손 사진은 꽤나 이미지가 강렬했는지 여러 뉴스 매체에 실리고, 다음 뉴스 메인에도 떴다. 꽤나 당혹하실 그 집주인분의 마음이 절절하게 이해가 되었다. 우린 별다른 파손 없이 침수만으로도 자연의 거대한 힘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폴딩도어 밖으로 비가 엄청 쏟아지는데, 그 빗물이 강한 바람에 밀려 폴딩도어 홈을 타고 가게 안으로 넘실넘실 들어오고 있었다.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다. 입에서는 절로 격한 말이 나왔다. 가게 안이 워터파크처럼 물로 넘쳐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침수에 머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하지만 가구를 그대로 둘 수도 없으니 급하게 박스를 깔아 자리를 만들어 옮기고 건물주분께 상황을 그대로 찍어 보냈다. 사람이 위기상황에 닥치면 힘이 솟아난다던데 정말인지 무거운 나무 수납장을 번쩍번쩍 들어 옮겼다. 물을 대략 걷어내고 비가 약해진 틈을 타 가게에 있던 두툼한 이케아 러그를 말아 폴딩도어 아래를 막았다.



평소에 우릴 예뻐해 주시는 맞은편 건물 사장님이 가게 안에서 급하게 움직이는 우리를 보고 가게 상황을 보러 와주셨다. 폴딩도어와 창문의 어디가 취약점인지 대신 체크해주시고 급하게 달려온 건물주분께 이런저런 부분이 문제라서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다고 대신 이야기해주셔서 태풍이 지나가면 건물주분이 조치를 취하기로 결론이 났다. 문제 원인은 가게 바닥의 기울기가 주방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외부 테라스 바닥과 실내 바닥의 높이가 같아서 폴딩도어 홈에 물이 차면 가게 안으로 물이 넘어와 안쪽으로 물이 흘러오는 것이었다.


안전한 구역으로 피신한 수납장과 쇼케이스들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나니 한없이 피곤이 밀려왔다. 당장 내일 장사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우선 금요일 오전에 픽업 예약된 생크림 케이크 주문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고객님이 양해를 해주셔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을 자고 집 안에 해가 들어서 오후 다섯 시쯤 밖에 나와보니 아스팔트가 바짝 말라있었다. 고작 3시간 전까지 가게에서 물을 퍼냈었는데 태풍이 제주도를 빠져나가자 하늘이 개이고 아스팔트가 바짝 말랐다. 폴딩도어도 언제 물이 넘쳤냐는 것처럼 홈에 물이 다 빠져있었다. 인스타그램에는 무지개가 뜬 태풍이 지나간 제주의 사진들이 올라왔다. 지나가던 단골손님은 이 정도면 양호한 태풍이었다며 서귀포와 제주 서쪽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모슬포쪽에 사는 친척이 15억짜리 배를 단단히 묶어두었는데 태풍때문에 수리비만 3억이 나올 것 같다고 했단다.

서귀포쪽은 폭포며 야자수며 난리도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바로 옆동네인 화북은 단수도 됐었다고 했다.

우리 가게 침수는 제주도가 태풍에 입은 피해로 봤을 때 음... 정말 별일 아니었다.



제주도의 태풍을 내가 너무 우습게 생각했나보다. 처음엔 엄청난 파도를 저멀리서라도 구경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동네 전봇대가 뽑혔다는 말을 듣고는 바닷가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 태풍에 돌이 날아다닌다는 말이 정말 거짓이 아니었다.(리얼이예요!) 바람도 비도 강했던 이번 태풍은 제주도 태풍을 우습게 보고 준비를 철저히 안한 덕분에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태풍이 가고 나면 평온할 줄 알았더니 이제는 엄청난 강풍이 분다.

내일 아침 간판이 안 날아가고 잘 붙어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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