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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노 Mar 30. 2016

나는 헬싱키보다 오울루가 좋다

레고처럼 아기자기한 핀란드의 도시 오울루


어린 시절, 레고로 마을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하나둘씩 모인 녹색 정사각형 판을 2X1 레고나 4X1 레고로 이어서 커다란 판을 만들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그만 집을 하나씩 지어나가다 보면 어린 나는 어느새 지쳐서 마을은 드문드문 집이 있고 그 사이에 커다란 도로와 정원을 가진, 건물보다 빈 공간이 많은 어설픈 마을이 되곤 했다. 그렇게 레고를 늘어놓은 채 하늘이 어둑해지는 저녁이 되면 레고를 밟을까 염려했던 어머니 등쌀에 허물어버리곤 했었다. 파스텔빛 예쁜 색으로 칠해진 목조 건물들과 작은 자작나무 공원, 그리고 동상에 작은 머플러를 매어주는 따뜻함으로 가득한 오울루와 내가 완성해보지 못했던 그 마을은 많이 닮아있었다.



제이드 말에 따르면 오울루의 동양인은 가끔 오는 교환학생들이나 자신같이 핀란드 남자와 결혼한 몇 명의 사람을 제외하면 거의 없어서, 길을 걷다보면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했다. 나쁜 의도는 아니고 익숙하지 않기에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는 것 같다고 덧붙여서 설명해주었다. 한 번도 동양인을 본 적 없는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무서워하면서 도망가기도 한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렸을 때는 백인의 이목구비가 익숙하지 않아 무섭게 느껴졌던 것 같다. 새삼 흰 피부에 금발 벽안인 야니가 한국에서는 반대의 경우였을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가 된 기분을 오울루에서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정말 낯선 곳에 뚝 떨어진 이방인 기분일 수도 있고.


동양인을 찾아보기 힘든 오울루 다운타운 거리





만족스러웠던 오울루 래디슨 블루 호텔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하룻밤을 보낼 래디슨 블루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다행히 비성수기라서 11시 얼리 체크인이 가능했다. 내가 예약한 방은 싱글 비즈니스 룸이었는데, 호텔 서비스도 좋고 방도 깔끔해서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고즈넉해서 마음에 들었다. 야니가 이 호텔이 오울루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라면서 국제적인 행사가 열릴 때 많은 사람들이 오울루 래디슨 블루 호텔에 숙박을 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1박에 8만 원 정도에 예약했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만족스러웠다. 침구류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인지 투숙객이 원하면 다른 종류의 배게로 교체해주는 서비스도 제공해주고 있었다. 그런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이 호텔의 최고의 장점은 오전 7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는 핀란드식 사우나 시설을 투숙객에게 무료로 제공해준다는 부분일 것 같다. 핀란드식 사우나를 체험하고 바로 옆 수영장도 함께 이용할 수 있다. 뜨거운 사우나 후에 차가운 수영장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다시 뜨거운 사우나에 들어가는 동안 여행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잠시 쉰 다음에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제이드가 제일 좋아하는 오울루 맛집 'Kauppuri 5'. 제이드가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제이드 집에서 코 앞인 줄 알았더니 웬걸 오울루 다운타운에 있는 햄버거 집이었다. 트립 어드바이저에서 오울루 맛집 2위를 차지한, 북유럽에서 제일 맛있다고 소문난 수제 햄버거 집이라고 한다. 오픈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줄을 서야 할 수도 있다면서 앞장서는 야니의 발걸음이 재빨랐다.




북유럽 최고의 수제 버거  Kauppuri 5


오울루에서 시바견을 보다니! 지난 홍콩 여행이 떠올랐다.



Kauppuri 5는 외관으로 보기에는 흔한 가게 중 하나로 보였지만, 실내에 들어서자 맛있는 냄새와 함께 힙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제이드는 여기 햄버거는 뭐든 맛있지만 블루치즈에 찍어먹는 프렌치 프라이는 꼭 먹어봐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각자 버거 단품을 하나씩 시키고, 야니가 프렌치 프라이에 블루치즈를 추가해 주문을 넣었다. 야니는 세 가지 돼지고기로 만들어진 육식용 버거를 주문했고 나는 제이드를 따라서 이 곳의 대표 메뉴인 염소치즈 버거를 시켰다.



내부 인테리어와 실내에 흐르는 음악조차 완벽하다.
맥도날드, 버거킹은 저리 가야한다. 100% 홈메이드 버거


10분가량 기다렸을까 커다란 접시 위에 높게 쌓아 올려진 햄버거가 나왔는데, 정말 먹음직했다. 중간에 두툼하게 끼워진 염소치즈와 패티가 침이 꼴깍 넘어가게 했다.


"이 집은 다 좋은데, 먹기가 불편해."


"그러게 그런데 햄버거가 진짜 맛있어 보인다."


"이 감자튀김도 먹어봐. 치즈에 찍어먹으면 더 맛있어."


제이드가 나를 위해 야니의 접시에 나온 감자튀김을 덜어다 치즈를 찍어먹어보라고 했다. 사양할 필요가 있나, 도톰한 감자튀김을 블루치즈 디핑을 찍어 입에 가져갔다. 짭조름하니 깊고 진한 풍미가 감자튀김의 바삭한 맛과 잘 어울렸다.



"진짜 맛있어!"


너무 맛있어서 나도 콤보 메뉴로 주문할 것을 그랬나 후회가 들었다. 디핑 소스를 한국에 가져가고 싶을 정도였다. 코카콜라와 함께 먹으니 더더욱 꿀맛이었다. 기름진 음식에 입이 환호했다. 며칠간 헬싱키에서 라면이며 짜왕으로 저녁을 해결해서인지 더 입에 착착 붙었다.


적양파와 토마토, 패티와 염소치즈, 소스와 야채가 햄버거 번과 잘 어울린다.
고기고기한 육식계를 위한 Only 고기 햄버거


쫄깃한 번에 사르르 녹는 염소 치즈와 쫄깃한 패티, 아삭한 야채가 더없이 조화로웠다. 맛있는 걸 뭐라 더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제이드에게 이 햄버거를 먹기 위해서라면 오울루에 들리는 것이 아깝지 않을 정도라고 이야기하니 제이드가 까르르 넘어갔다. 몇 달 전부터 제이드가 카톡으로 정말 맛있는 햄버거 집이 오울루에 있다고 말했었는데, 실제로 와보니 진짜였다. 이 맛있는 햄버거를 오울루에 두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오울루로 교환학생을 올 한국 대학생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스톡만 백화점의 크리스마스 디스플레이는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야니가 스톡만 백화점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시간이 되었다. 내가 머리를 다듬고 싶어 해서 야니가 일을 가기 전에 다 같이 스톡만 백화점 안에 있는 미용실을 알아보았는데 비싸기도 하고, 예약이 이미 꽉 차있어서 여행 중에 미용실 가보기 미션은 아쉽게도 완료하지 못했다. 야니는 제이드에게 나를 데리고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라고 추천해주면서, 아기 오리를 떼어놓고 가는 어미 오리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야니가 나에게 익숙해질수록 점점 닭살 부부의 면모가 드러나는 것 같다. 제이드와 나는 걸어서 마켓홀을 구경 가기로 했다. 마켓홀 옆에 있는 익살스러운 경찰관 동상은 오울루의 상징이기도 하다.



마켓홀 맞은편에는 상점으로 꾸며진 트럭이 와 있었는데, 핀란드식 사우나를 할 때 필요한 비흐따 Vihta도 판매 중이었다. 비흐따는 잎이 달린 어린 자작나무 가지를 묶어 만든 것인데, 사우나 안에서 몸에 두드리며 혈액 순환과 근육 이완에 도움을 주는 용도라고 한다. 별도로 몸을 때릴 때 나는 잔잔한 나무향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준다고 하니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는 셈이다. 핀란드 사람들은 광적으로 사우나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냐면 중산층 가정만 되어도 집에 가정용 사우나가 따로 있다고 한다. 실제로 들렸던 야니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집에는 가정용 사우나실이 화장실과 붙어 있었다.



오울루의 마스코트 경찰관 동상



북쪽에 온다고 옷을 꽁꽁 싸매서 그런지, 제이드가 찍어준 내 모습은 오울루의 경찰관 동상과 쌍둥이처럼 보였다. 오울루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청바지에 코트를 입고 외출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청바지가 기모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다가 어는 날씨에 청바지만 입고 외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꽝꽝 얼어버렸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눈에 비치는 흐린 하늘과 눈이 쌓인 바닥과 얼어붙은 바다가 똑같이 채도가 낮은 회색빛이었다. 추위를 피해 커다란 목조로 지어진 마켓홀로 들어갔다. 항구에 있는 창고처럼 생겼는데, 실제로는 1901년에 지어진 실내 마켓 건물이라고 한다. 



1901년에 지어진 오울루 마켓홀



1901년에 지어졌다고 하기에는 깔끔하고 예쁘다. 신세계 지하 식품 매장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클래식한 벽돌색 바닥 타일이 마름모꼴로 깔려있고, 목조로 칸막이가 만들어진 다양한 상점들에서는 생기가 넘쳤다. 내일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그런지 마지막 준비를 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치즈 가게 직원이 컷팅 중인 블루 치즈가 먹음직해 보인다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던 와사비 치즈, 커다란 녹색이 무시무시하다.
치즈 가게에는 다양한 치즈가 보기 좋게 놓여져 있다.
훈제 생선 가게가 기다리는 손님들로 분주하다.
다양한 훈제 생선들이 놓여져 있다.


복도는 겨우 사람이 지나갈 만큼 붐비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은데도 환기가 잘되어서인지 마켓 안에는 맛있고 고소한 냄새들과 신선한 공기가 가득했다.


아기 모양의 빵


핀란드 디저트들, 주황색 설탕 코팅이 입혀진 과자는 안에 커스터드 크림 파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른들도 어딘지 모르게 들뜬 분위기다.


기둥 한쪽에는 티켓처럼 뽑을 수 있는 번호표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옛날 버스 승차권처럼 생긴 종이가 클래식하니 예뻤다.


크리스마스 햄용 돼지 고기들, 돼지 넙적다리 살로 만드는 크리스마스 햄은 크리스마스 식탁에 빠지지 않는 필수 요리다
마켓홀 안의 야채, 과일 가게.
털실이나 가죽 공예품들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영업 110주년을 축하하는 오울루의 마켓홀에서 곧 다가올 명절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보이는 선량한 미소들이 오울루의 한 조각을 채웠다.






영화처럼 아름다운 도시




나에게 영화 같은 도시란 오울루처럼 눈길 닿는 곳마다 과하지 않게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도시일 것 같다. 자작나무가 심어진 작은 공원도, 낮고 넓게 지어진 아름다운 양식의 건물들도 소소하게 아름다웠다.




오울루의 예쁜 카페 Puistokahvila Makia



사람들이 지나가는 공원 중앙에 있는 카페 Puistokahvila Makia는 편안한 소파들과 예쁜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카페였다. 오울루의 여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고 하니, 시간이 된다면 들려보면 좋겠다. 



나의 추천 메뉴는 역시 kahvi다. 핀란드는 진하게 커피를 내려마시기에 우유와 설탕은 필수다. 날씨가 추운 나라를 여행 중이라 그런지 지방이 듬뿍 들어간 디저트며 설탕이 듬뿍 들어간 음료를 마시는 것이 은근한 재미이기도 하다. 진하게 내린 커피에 우유와 설탕을 넣으면 우리나라 믹스 커피나 커피 우유 맛이라고 상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맛이 묘하게 다른 것이 정말 맛있기 때문에 추천해주고 싶다. 카운터 위에는 다양한 페이스트리가 보이는데 그중에 바람개비 모양으로 자두잼이 얹어진 페이스트리는 요울루토르투트Joulutortut라는 크리스마스 음식이다. 아쉽게도 카페에 자리가 없어 구경을 하고 근처 다른 카페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눈 내리는 오울루의 밤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한국의 눈은 뭔가 폭신한 질감이라면, 핀란드의 눈은 마르고 단단한 가루 같다. 곧 도로가 하얗게 덮이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먹고 나온 뒤에 소화를 시킬 겸 오울루 시청을 구경하러 갔다. 오울루 시청은 19세기 러시아 지배 시절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내리는 눈과 시청의 모습이 잘 어울렸다. 내리는 눈에 춥기도 하고 야니의 퇴근 시간이 늦어진다는 소식에 호텔로 가기 위해 시청 뒤쪽으로 걸어갔는데, 귀여운 조각상들이 보였다.



처음에는 머플러를 하고 있는 시민들의 행렬을 조각한 것이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에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하나씩 손수 메어준 것이었다. 맨 앞의 소년의 동상 외에도 방수천을 뜯어 만든 것 같은 미니 머플러를 동상들이 하나씩 하고 있었다. 따갑게 내리는 눈 속에서 머플러를 한 동상들의 얼굴이 미소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누가 이 동상들에게 머플러를 해줬을까?


동상들은 그냥 동상일 뿐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추위도 못 느끼고, 계절도 못 느끼는 이 작은 시민들의 동상에 누가 하나씩 머플러를 만들어 주었을까. 하나하나 작은 천조각으로 잘라서 목에 둘러주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나는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퍽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고 이 곳의 동상들은 따뜻한 집에 가버린 사람들을 야속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심한 밤에 모두가 잠들었을 때 이 머플러를 받은 동상들은 제법 이 오울루가 살만하다고 인간미가 있다고 다른 동상들에게 주장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다. 난 이 도시가 하루뿐이었지만 참 좋았다. 헬싱키보다 사람 사는 곳 같은 이 오울루가 내가 상상했던 북유럽과 닮았다.

헬싱키에서 바람의 맛이 났다면, 오울루에는 머무르고 싶은 따스함이 있었다.







소개된 오울루 장소들의 위치 안내



오울루 래디슨 블루 호텔 위치 : https://goo.gl/maps/4ZGiX34yDU42

수제버거집 Kauppuri 5 위치 : https://goo.gl/maps/MMKPeRSjpv72

수제버거집 Kauppuri 5 메뉴 : https://www.kauppuri5.fi/menu

오울루 스톡만 백화점 위치 : https://goo.gl/maps/43Urm6zmcMK2

오울루 경찰관 동상 위치 : https://goo.gl/maps/fKfBk4xgm2q

오울루 마켓홀 위치 : https://goo.gl/maps/Bkwar6znY7D2

카페 Puistokahvila Makia 위치 : https://goo.gl/maps/aiNpv5pDmJv

카페 Puistokahvila Makia 홈페이지 : https://www.raflaamo.fi/fi/oulu/puistokahvila-makia

오울루 시청 위치 : https://goo.gl/maps/TsYPjZYERh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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