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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노 May 13. 2016

청소

청소란 추억을 정리하는 일


그간 글을 적지 못했던 것에 대한 변명을 좀 하자면 집을 청소하고 있는 중이다.

무슨 집 청소가 이리 오래 걸리냐 싶으시겠지만, 내가 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잠깐의 리모델링 기간을 제외하면 거의 23년간 살았던 집이라 대답하고 싶다.

이번 발굴에서는 아버지의 청춘부터 국민학교 성적표, 어릴 적 읽던 동화책까지 많은 것들을 찾아내었다. 어떤 책은 너무 예전 것이라서 지금 읽기에는 퍽 성격이 맞지 않아 아쉬운 것들도 있고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책들도 많다. 특히 오세암은 청소하던 중 서서 읽다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말았다.

정리를 하다 보니 소유가 꼭 행복의 척도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뭐든 다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마냥 가지고 있는 것은 나에게도 집에게도 좋지 않은 것 같다.특히 책은 가지고 있으면 무조건 좋으리란 생각이 있었는데,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책은 결국 나중에 이렇게 대규모의 청소에야 발견되곤 하니 그것도 좋은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찾다 보니 재미난 책들이 많다. 1750원(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가격!)에 구매했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은 내 기억에는 중간중간에 들어있는 만화를 더 재미있게 보았다. 그런데 지금 펼쳐보니 만화가 어찌나 소설의 맥락을 끊어먹던지 이걸 재미있게 읽었단 말이야?라는 의아함이 들었다. 내 기억 속에서의 나는 국민학생 때부터 어른들이 읽는 소설책도 읽고 나름 유식하게 굴었다 생각했는데, 막상 어릴 적 읽던 책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나이 때에 적합하도록 다시 각색된 소설책들도 꽤 많았다.



그리고 막내 이모가 도자기를 전공하면서 구워준 그릇과 컵들도 찾아낼 수 있었다. 도자기들을 포장한 신문들이 어찌나 오래되었는지 광고를 보면 웃긴 게 많았다. 이젠 고3 아들을 둔 이모의 청춘을 상징하는 도자기들을 보니 코 끝이 시큰했다. 살짝 보이는 저 '오륙도' 폰트를 보면 세월이 짐작되시려나.

제일 놀라운 발굴은 아버지가 삼성물산에 재직 중이실 때 받아오셨던 2004년 연말 선물 세트 박스였다. 베란다 제일 구석에 놓인 박스 안에는 키친아트 냄비 8종 세트가 들어있었는데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제법 쓸만한 냄비들이었다. 디자인은 이미 12년 전 것이라 오래된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반짝반짝 새 것이었다. 세월의 흔적은 요즘 냄비답지 않은 묵직함 정도랄까.



베란다를 그렇게 모조리 들어내니, 화분들이 남았다. 처음엔 화분들을 버릴까 했는데 흙을 들고 나를 고생을 생각하다 보니 그냥 꽃씨를 뿌리기로 했다. 화분들을 살펴보면 애지중지 기르던 난을 내게 맡기고 군대를 갔던 첫 남자 친구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네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미안하다. 내가 그 난 다 죽였어...



꽃씨도 좀 남다르게 구매하고 싶어 구매했는데. 꿀풀과 꽃향유는 지금 싹도 못 봤다. 흙이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물레나물은 씨를 한 화분에 1000개는 뿌린 것 같은데 딱 하나 씩씩하게 싹을 틔웠다. (왼쪽 사진) 안개초는 너무 다 빡빡하게 올라와서 걱정하고 있는데 요즘 뭐가 부족한지 픽픽 쓰러져 죽어나간다. 남은 애들은 잘 살려볼 생각이다. 누가 꿀풀과 꽃향유가 왜 도무지 싹을 안 틔우는지 아는 분 계시면 조언해주시면 좋겠다. 야생화 계열이라 뿌리기만 해도 잘 자랄 줄 알았더니 어머니 왈 그냥 개량된 꽃씨나 사지 그랬냐고 그러신다. 솜 발아도 하는 중인데, 누가 인터넷 공유기 위에 올려두면 온실효과가 있다 해서 공유기 위에 올려뒀더니 너무 뜨거워서 그런지 다 죽은 것 같기도 하다. 여러분 인터넷 공유기가 이렇게 뜨거운 겁니다.



청소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청소가 시작된 계기는 우리 삼남매 중에 둘째인 여동생이 시집을 갔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짐을 풀어내는 족족 우리 삼남매의 과거 사진이며, 같이 보면 책들이 나올 때마다 마음이 술렁술렁한다. 이젠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며, 추억들이 빈자리를 상기시키는 것 같다. 요즘은 SNS가 많이 발달해서 그리운 것들이 나오는 족족 가족 단톡방에 올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를 하며 느끼는 그 씁쓰레한 추억은 청소를 하는 사람만이 오롯하게 느낄 수 있는 특권인 것 같다. 이제 책 정리가 다 끝나면 여름이 오겠지.


올해 여름엔 어떤 추억이 쌓여 미래에 찾게 될 것인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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