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슴 속의 이상향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장에 들러 야채와 고구마를 사고 논스로 향한 날.
'이제 봄이야..' 를 속삭이듯 산들바람 불어오는 역삼역. 미세먼지와 도시 소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세상과 나의 존재함을 다시금 인식해본다. 그렇게 호흡에 취한 채 걷다 보면 역삼의 지붕, 논스 언덕을 마주한다. 언제나 그렇듯 우뚝 서 있는 이 놈의 언덕.. 겨울이든 봄이든 참 적응이 안 되는 놈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저기 위에 있으니 내가 올라가는 수밖에..
할딱할딱 거리며 올라가니 고구마와 야채가 가득한 파란색 비닐봉지들이 앙손에서 춤을 춘다. 서걱서걱 비닐 스치는 소리는 덤. 오분 정도를 그렇게 '등덕'을 하니 먼발치에서 보이는 시퍼런 논스 1호점 창문 실루엣.
"후.."
숨 한번 격하게 내쉬어주고 다시 등덕을 이어간다.
어스름한 먼발치에서 보이는 자그마한 빨간 불빛. 가엾은 중생들에게 등댓불이 되어주는 논숙자 그대들의 담뱃불, 자신의 폐를 희생하여 고행자들의 앞을 밝혀주니 그렇게 숙연해지고 고마울 수가 없다. 이것이 진정 논스의 따뜻함인가.
그렇게 담뱃불들 표적 삼아 걸어 올라보니, 갑자기 오른쪽에 등장하는 늠름한 검은색 친구. 그 자태가 굉장히 묘하다.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단련된 그대의 앞태와 뒤태. 인간의 선은 직선이나 신의 선은 곡선이라 하지 않는가. 발밑부터 머리까지 다 곡선인 검은 그대는 교만한 것인가, 황홀한 것인가.
'포..포르쉐네?..'
'설..설마.'
설마 하는 순간 나타나는 논스의 빌런 배 모 씨.
이름하여 JJ.
그것이 드디어 일어났구나.
.
.
"어, 영원!"
"뭐야.. 진짜 산거야?"
"그럼 진짜로 사지 가짜로 사냐?"
"아니.. 그래도.. 뭐지.. 갑자기 혼란스럽다"
얼마 전 라운지에 얘기하다가 형이 뜬금없이 포르쉐 타고 싶다 하길래, 미국타령만큼 또 쓸데없는 소리거니.. 하고 한쪽 귀로 흘려 들었는데, 이 양반이 진짜 포르쉐를 질러버린 것이다.
"살면서 포르쉐 한 번 타 줘야지~"
"아니 그렇다고 바로 포르쉐를 지르는 사람이 어딨어"
"야 그렇게 안 비싸"
"뭐가 안 비싸.. 스포츠 카구먼.. 뚜껑도 열리네"
"아 이거 내가 혼자 산거 아냐"
"Whutt!?.."
사정을 듣자 하니, 혼자서는 구매하기가 좀 빡세니 논숙자 한 명 꼬드겨서 '공동구매'를 했다는 것. 두 명이서 소나타 살 돈으로 포르쉐 한 대를 뽑아 나눠 탄다는 것이 그들의 취지다.
"그리고 다시 팔 거야"
"응?... 이 좋은 걸?"
"에이 뭐 1년 둥글게 타고 다시 팔아야지"
"오호.."
"자동차는 감가상각이 돼서 계속 가지고 있기엔 메리트가 없어"
"올~"
"그리고 1년만 타고 다시 팔면 거의 본전도 많이 회수가 됨"
"오오올~"
"그리고 다음으론 페라리 타 보지 뭐"
"오오오올~!!!!"
허당 JJ가 갑자기 멋있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인가, 아니면 아직 나에게 물질에 대한 욕망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인가.. 수행의 길이 참 멀고도 멀다.
"형, 같이 산다고 해도 어차피 최종 구매자는 한 사람이었을거 아냐"
"응"
"돈을 서로 서스름 없이 막 주고 그러네?"
"뭐 친하니깐 그렇지"
당연한 건가? 아니다.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돈 몇 천만 원을 주는 건 가족끼리도 주저하는데 전에 생판 모르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리스크가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계약서 같은 법적인 체제도 동원한 것이 아니기에 이건 뭐 '눈 가리고 사람 믿겠다'라고 밖에 해석이 안된다. 속된 말로 '돈 먹고 튀면' 알게 뭔가.
"특이하군.."
그렇게 당연하면서도 당연한 것 같지 않은 논스의 현상을 기묘하게 여기며 파란 봉지들을 가슴에 안고 논스 빌딩 계단을 올라간다.
'꾹'
계단 옆의 버튼을 누른다.
스르르 열리는 자동문.
널찍한 로비가 펼쳐진다. 봉지들을 부둥켜 안은채 프로젝터와 음악이 켜져 있는 라운지를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간다. 이름하여 공용키친. 싱크대 옆에 고구마와 잡재료들을 던져 놓고 정수기에 물을 받아 벌컥벌컥 마신다.
그리곤 가만히 서 있어본다.
'흠..'
아까 느꼈던 기묘한 느낌.
물컵을 잡고 1층 라운지를 한 바퀴 돌아본다. 세탁실도 가보고, 세탁실 옆에 회의실과 스터디 룸들도 쭉 둘러본다. 1층으론 성에 안 찼는지 계단을 올라가 본다. 코워킹을 스윽 훑어보고 3층 코리빙으로 올라가 샤워실과 요가룸을 쭉 둘러본다. 손엔 묵직한 까만 물컵이 계속 들려있다.
'흠..'
그래도 부족해는지 계단을 한 층 더 올라가 본다. 망원경이 보이고 디제이 부스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옆에는 루프탑 진입문.
지문을 댄다.
"문이 열렸습니다~"
적막을 깨는 친절한 아낙네 목소리.
루프탑으로 나선다.
오늘따라 청명한 하늘.
루프탑 펜스 바깥에 펄쳐져있는 것은 콘크리트 건물들. 그리고 저 멀리에 우뚝 서 있는 나의 최애 관악산.
'후..'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어 본다.
"이걸 나 혼자 다 소유하려 하면 얼마나 들까?"
혼잣말 아닌 혼잣말.
"근데 여기서 혼자서 놀면 재밌으려나?.."
또 혼잣말.
"무튼 돈은 음청 많아야겠지.."
그렇다. 엄청 많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누리고 있다. 논스에서 나눔으로써 누리고 있다. 루프탑 풀장에 거만하게 등을 기댄채 역삼과 강남을 한 아름 누리고 있다. "혼자는 소나타, 같이는 포르쉐" 라는 공식이 '우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쉐프 지망생들의 꿈인 초대형 부엌이 독식이 아닌 나눔으로써 가능한 것처럼..
그렇게 나는 역삼동 한 구석에서 널찍한 라운지, 공유벤츠, 유튜브 스튜디오, 초대형 칠판과 모니터가 딸린 스터디룸, 탁구장, 디제이부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누리고 있다.
소유란 무엇인가?
소유에 대한 철학을 재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모두 '내꺼'를 위해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 있는데 애초에 '내꺼'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실질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거 하나 소유하겠다고 내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붙이고 서로 치고받고 혈투를 벌일 필요가 있는지 물어볼 필요성을 느꼈다.
"니꺼 내꺼가 어딨노.. 우리가 남이가"
아버지가 한 말이다. 그저 이 스쳐가는 생에서 먹고살기 위해 수십억 년 동안 대자연이 빚어 놓은 땅을 잠시 빌리는 것뿐이지 실제로 그 땅은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당신의 철학. 똑같은 순리로 나의 몸 마저 게임 아바타마냥 내가 요물조물 선택한 것 아니고 신비스러운 대자연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연의 아들딸이자 우리 자신과 만물을 모두 동등하게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
바로 이 사고에서 너와 내가 한 몸이 되는 정서로서의 '정'이 탄생한다. 1+1+1=1 혹은 1+100=1 혹은 1+∞=1 이라는 다원적 일원론, 즉 정의 논리다. 정에는 따뜻하고, 순박하고 나누고 보듬는 아름다운 공동체 정서가 스며들어 있다. 나의 집이 아니고 우리 집, 나의 마누라가 아니고 우리 마누라, 내 남편이 아니고 우리 남편, 내 아들이 아니고 우리 아들, 내 나라가 아니고 우리나라, 내가 너고 너가 나인 것처럼.. 나누어 주고 끌어안고 보살피는 인간애와 만물애의 표본이 우리의 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 '나'만 살자고 마스크나 식량 사재기를 할 때 이를 "정 떨어진다" 한다.
이는 도와 덕이 아닌 규칙에 따라 흘러가고 자본이 곧 권력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우리 민족의 얼인데 이로써 발생하는 인지적 부조화는 지금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마음의 감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정의 문화, 정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막상 외부에는 정 떨어지는 것들만 판을 치고 있으니 마음이 아픈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안타깝게도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서양의 체계가 근본 없이 무분별하게 이식되었기 때문인데 선악이분법을 근본으로 삼고 있는 서양철학은 사실 '정'의 논리와 굉장히 대비되는 사상이다. 서양 문명의 원천인 그리스 신화의 주제가 전쟁과 평화, 죽음과 삶, 악과 선의 대립관계로 구성되어 있듯, 헤겔의 변증법, 정, 반, 합의 논리가 다 여기서 도출되듯, 사물을 일단 이분법적 대립물로 설정하는 그들의 세계관에선 갈등과 모순, 그리고 투쟁이 태고의 실마리다.
본 세계관은 객체와 환경을 엄격히 분리하면서 세상을 객체와 외부(환경)와의 갈등, 즉 외적갈등으로 인식하며 여기서 발생하는 갈등을 객체와 객체 혹은 객체와 환경 사이의 타협과 양보로써 해결하려한다. 이로써 문제가 발생했을 때 원인을 외부의 침입, 외부의 영향에 두고자 하는 경향이 굉장히 강하다.
이에 반해 우리 선인들은 객체와 환경의 분리를 여전히 미성숙한 단계의 사고로 보았으며 궁극적으로 나와 우주를 분별하지 않고 모두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아야한다는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로써 무엇이 이기성이냐, 무엇이 이타성이냐고 묻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해지며 갈등과 문제의 원인은 객체의 내면에서 오는 것으로 해석된다. 고통과 번뇌는 내부에서 오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 즉 '자아'가 만들어내는 것으로 그걸 해결하기 위해선 애초에 쓸데없는 탐욕을 부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탐욕을 부리지 않더라도 남의 탐욕에 의해 해를 입기마련. 그런 상황에서는 복수를 하거나 무력을 쓰기 보다는 용서 등을 통해 스스로 그것을 승화시켜야 하는데, 이 사고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리의 해학문화와 '한' 문화다.
결국 나는 가만히 있는데 외부의 '나쁜놈'들이 나에게 똥을 던지려한다는 시각이 서양과 가깝다면, 내가 똥을 맞았다면 그것은 대부분 내 자신이 더 큰 우주로서의 나에게 스스로 똥을 던졌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 시각과 가깝다 할 수 있다. 이로써 코로나 때문에 유럽에서 동양인이 뚜까 맞았다는 소식과 미국에서는 바이러스가 터졌는데 뜬금없이 총기 판매량이 승천하고 있다는 소식은 더이상 충격적이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물론 '우리'가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문화는 말 그대로 '우리'를 내세워 약자를 희생시키고 다른 공동체를 배척시킬 수 있다는 중대한 리스크를 수반한다. 이 리스크를 헤징하기 위해서는 선인들이 강조한 '우리'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고 서양의 객체주의 사고를 어느정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 문화에서 '우리'란 '우주'를 말한다. 즉 내가 너고 너가 나일 때의 '너'는 하늘, 땅, 모든 생명, 모든 행성, 모든 은하를 말하는 것이다. 분별이 없으니 역시나 이기성과 이타성의 구분 조차 무의미해진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된다.
하늘, 땅, 그리고 우리
포르쉐 얘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으로 빠진 이유는 역시나 '논스'라는 괴이한 집단을 감히 해석해보기 위함이다.
세간에 알려져 있다시피 논스는 블록체인 철학에 영감을 받아 출범한 커뮤니티다. 비트코인 백서가 기존의 금융체계에 대항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고 블록체인이 기술적으로 암호학과 컴퓨터 엔지니어링 최극단에 있는 만큼 관련 커뮤니티들은 굉장히 급진적이고 수학적 합리성을 추구하며 이로써 굉장히 서양의 개인자유주의적 색채가 짙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을 미루어보아 논스 또한 서양의 평범한 해커하우스처럼 차가운 논리와 규칙에 의해 운영되고 공동체 정신보다는 ‘사람은 목표를 위한 수단’과 같은 사고가 우선시 될 법하다.
물론 첫인상은 "Money, Power, Glory!" 와 같은 수식어를 자아낼 정도로 강렬한 서양적 카리스마를 풍긴다. 하지만 라운지에 앉아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대화하는 모습, 상호작용 하는 모습을 보면 이건 완전 츤데레가 이런 츤데레가 있을 수가 없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보물을 꺼내 나눌 줄 알고, ‘나만 잘 살면 되지’가 아닌 ‘우리의 건강한 커뮤니티 생태계’라는 더 높은 가치를 위해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고 아끼고 있는 모습이 신기루 같다. 그냥 소기의 '목적'을 위해 단기적으로 모인 것이라기 보단, 정말 삶을 함께 하기 위해 같이 모인 것 같다는 강한 느낌이든다. 부엌에 저녁마다 구수한 밥 냄새가 퍼지고 따뜻한 사람냄새가 나는 것은 단순히 ‘블록체인’으로 설명하기엔 심히 부족하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라는 말이 있다. 이로써 논스는 드러나는 행동양식은 굉장히 주체적이고 도전적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삶에 대한 근본철학은 정과 상생인 곳이다. 계산적이고 논리적인 서양식 머리를 하고 가슴에는 동양의 무한한 포용적 사랑을 안고 있는 생물이랄까.. 진정한 동과 서, 음과 양의 조화. 그럼으로써 ‘같이’ 좋은 차를 타고, ‘같이’ 널찍한 라운지를 즐기며, ‘같이’ 강아지를 키울 수 있고, ‘같이’ 육아도 하는, 정말 ‘같이’ 행복하게 잘 살아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곳이다.
소나타와 포르쉐의 차이는 사실 그리 크지 않다. 개인적으로 자가용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그냥 둘 다 바퀴 네 개가 멀쩡히 달려있고 하나는 아주 살짝 더 특이해 보인다는 차이점 밖에 없는 것 같다. 나에겐 그런 스펙적 차이보다는 두 모델이 시사하는 인간적인 메시지가 더욱 매력적이다: 포르쉐가 이상향이라면, 나눔과 상생 안에서 우리는 이상향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
이로써 나는 논스를 '이상향'이라 말한다. 물질적, 외적 이상향이라기 보단 가슴에, 영혼에 이상향을 품고 있는 곳. 서로 이상향을 공유하면서 같이 하나가 되는 그런 이상향 말이다.
작성 김영원 (Eternal Kim)
1. 도전정신(Challenging the Status Quo):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
2. 다양성(Diversity):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진심을 다해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
3. 공유(Sharing): 나의 자원을 공유함으로써 함께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