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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스 Apr 10. 2020

코리빙, 강아지를 품다.

순간과 생명이 주는 삶의 황홀함

꽃망울 새로 터지고 땅에서도 연둣빛 새싹이 움트기 시작하는 봄의 어귀에, 달콩이가 논스에 왔다. 논스에 온 지는 아직 몇 주 되지 않았고 세상에 나온 지는 세 달이 채 되지 않았다.


달콩이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다들 생긴 것만으로 현실성이 떨어지는 강아지는 처음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덕분에 달콩이네 방은 사람이 하루에도 대여섯번 왔다갔다 왕래가 잦아졌다. 처음 대면하면 핸드폰을 쥔 채 멍하니 감탄만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달콩이가 살아 숨쉬는 것 자체에서 오는 경이로움은 사람을 홀리기 일쑤다.


얘 살아있어, 말도 안 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작은 생명은, 그동안은 세상에 없었다가 갓 나타났다는 사실을 너무 또렷하게 티낸다. 자신의 신체가 익숙하지 않은 듯 엉성하다. 작은 다리로 어색하게 삐뚤 빼뚤 걷고 뛰다가, 버퍼링 걸린 것마냥 뜬금없이 뚝 일시정지한다. 꼬리로는 마구 행복을 표현하다가도 자기 몸의 일부라고는 인식하지 못하는 건지 채 이빨도 나지 않은 그 조그만 입으로 털레털레 흔들리는 자기 꼬리를 마구 물어본다. 그러다가 여물지 않은 성대로 무언가 표현하겠다고 소리를 낼 때면 바라보는 사람 가슴 언저리가 지긋이 간지러워 온다.


보기만 해도 사랑스럽다. 미소를 입에 걸어주고 마음 속에 없던 사랑도 만들어내는 어린 생명은 바쁜 삶에 치여 사는 우리의 무의식중에 가라앉아있던, 태고의 신비스러움과 삶 자체의 아름다움을 수면 위로 떠올리게 한다. 또 사랑의 힘은 강해서, 달콩이를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스러움에 흠뻑 취해 그 공간에서 같은 감동을 느끼는 다른 이들과 평소보다 한 층 쉽게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누군가 가진 마음의 장벽을 허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장벽을 타인에게 허물어 보이는 것 또한 쉽지가 않다. 그 어려운 일이 세상에 나온지 막 여든 일 정도 된 달콩이가 존재만으로 해낸 일이다. 


장하다 장달콩!



낙타의 삶, 사자의 삶, 그리고 어린 아이의 삶

 

모든 것이 궁금하고 모든 것이 신기한 달콩이를 보고 있자면, 낙타의 삶도 사자의 삶도 아닌 어린 아이가 되어 춤추며 살아야 한다던 니체의 말에 수긍이 간다. 뚜렷한 자기 기준 없이 순응하며 사는 낙타의 삶이 있고, 위엄있지만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늘 전전긍긍해야 하는 사자의 삶이 있다. 니체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물며 순간을 축복하는 삶이 어린 아이의 삶이라며, 그것이 바로 궁극적인 초인의 모습이라고 했다. 나 자신은 요새 어땠던가, 과연 여전히 모든 것이 새롭고 여전히 모든 것에 궁금해하고 있었는가 다시금 되돌아보게 된다.


하늘 아래 진정으로 새로운 것 하나 없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똑같은 것도 하나 없다. 내가 어떻게 보냐에 따라 마주하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날 수도 있고 식상하고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실과 성장에만 집착하는 강박적 태도는 호기심을 앗아간다. 


최근에 나를 포함하여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 어디에서, 얼마만큼 놓아야 하는지 몰라 힘들어 하는 것을 목격한다. 산업화 이후 인간 사회는 자신을 몰아치며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는 노력’을 더더욱 우상화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추김에 맞추어 하다하다 힘에 부쳐 놓으려 하면, 언제부터인가 자신 안에 자리잡고 있는 정체모를 완벽주의가 스스로에게 나약하다 손가락질한다.


“끊임없이 기승을 부리는 내외의 불안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왜 우리는 항상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데도 충분히 일하지 못했다는 불편한 감정에 시달려야 하는가?”

-        선택의 조건, 186 p, 바스 카스트


‘선택의 조건’ 저자 바스 카스트는 인간 사회가 평균적으로는 점점 부유해지는 데도 불구하고 개인의 불안은 늘며 바빠지고 피로해지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한 개인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가 더 줄어가는 이유는 개인이 바라기만 한다면 다 이룰 수 있다는 마케팅 산업에서 오는 너무 많은 선택지와 거기에서 오는 불확실성 때문이다.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함은 더 많은 것을 손에 쥐어야 직성이 풀리게끔 만든다.


끊임없이 필요한 것 이상으로 가지고 노력하도록 부추겨지다 보면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고통 외에 거시적으로도 ‘놓을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놓이지 못하고 사회 구조적 문제에 고통받는 사람들 또한 생겨난다. 주 80시간을 일해야 겨우 생계를 꾸리는 돈을 버는 등, 놓고 싶어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먼저 살다 간 누군가가 놓지 못한 욕망의 피해자이다. 사회적 격차, 그리고 불균등은 한 번 심화되면 완화하기 어렵다. 그래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도, 노력해야 할 때와 비워야 할 때를 함께 강조해야 한다. 자동차에 액셀과 브레이크가 어느 하나라도 고장 나면 곤란한 것처럼 말이다.



순간이여, 너는 참 아름답구나


북적거리는 도시 안에서도 잠깐 시야를 돌려 골목 구석의 새싹을 보면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항상 그래 왔듯이 만물을 낳고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꾸준히 매 봄 싹과 꽃을 피워내고, 삶을 순환시키고 있다.


“만물은 각자 자신의 자리가 있으며 매 순간이 완벽하다”


내가 괜한 기를 부리며 나 자신이 미워 힘들어할 때, 가까운 이가 해준 말이다. 삶을 성실하고 진솔하게 대한다면 모든 것이 스스로 그러해진다 한다. 삶을 온전하게 믿고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걱정과 욕망을 내맡길 때, 사람은 무거운 낙타의 짐을 벗고, 답답한 사자의 갈퀴를 내려놓고, 사랑과 호기심이 넘치는 어린아이로 살 수 있게 된다.


지금 와 문득 돌아보면, 짐을 져내려고 애를 쓰던,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발톱을 한껏 세우던, 삶은 삶인 채로 흘러갔다. “너 되게 쉽게 살려고 한다”는 말을 들은 바로 다음날 “너만큼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려 애쓰다가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켜 슬펐던 적도 있었지만, 어떠한 노력 없이도 나도 몰랐던 나의 좋은 면들을 보아주고 일구어 내주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 빠듯하게 행복했던 적도 있었다. 밤을 새워가며 오랜 기간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내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허물어져 무산되는 경우도 있고, 그 어떤 조짐도 없이 선물처럼 주어지는 일감, 경험, 추억 그리고 사람 관계도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때그때 어린아이처럼 넘어지더라도 후딱 털고 일어날 수 있느냐, 우연처럼 느껴지는 기쁜 일들에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느냐 그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삶은 혼란스럽고도 신성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는데, 그런 특성 때문에 삶은 문학에서 주로 바다로 비유되곤 한다. 삶이 바다라면, 우리는 감히 전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항해하며 각자의 신화 그리고 이야기를 써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그 항해에 필요한 지도를 그리는 역할을 한다. 처음에는 세세하고 정확하게 지도를 채워 나간다.


‘갈 곳이 많으면 좋잖아? 적어도 나쁠 일은 없지.’


하지만 점점 욕심이 생기고 지도를 지나치게 빽빽하게 채우게 되면 결국에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너무 많은 선택지는 오히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사람을 괴롭게 하는 불안은 불확실성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삶을 믿지 않고, 삶은 원래 고통과 투쟁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면 허상 혹은 이상향을 좇게 된다. 하지만 삶을 믿기 시작하면 부족한 2%보다 완벽한 98%가 보이고, 매 순간이 이상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관점이 재조정된다. 삶을 믿는 마음가짐으로 겪어온 인생을 돌아보면, 진짜 멋진 것들은 내 개인적인 투쟁이나 욕망들과는 무관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그럼 될 일이라면 될 테니 아무 노력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아니, 주체적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주체적으로 스스로를 잘 알게 됨으로써 현대 사회가 그려놓은 ‘일도 잘하고 명망있고 돈도 많은 초인’이 되지 않으면 실패자라는 틀에서 벗어나자는거다. 자라난 주변 상황, 그리고 사회의 시선들로 인해 심어진 욕망들을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실수를 피하자는 것이다. 지금 당장 옆에 있는 존재들과 경쟁하기 이전에 한 번 더 눈을 맞춰보고, 유려한 생의 결에 발맞추어 흘러가는 것이 그 자체로 얼마나 즐겁고 멋진 일인지 깨닫자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물살을 거슬러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책하거나, 내 앞에 쟤보다 멀리 가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는 등의 욕망이 낳은 고통을 놓자는 것이다.


사회의 시선이 만들어놓은 “대단함”을 따라가기보다, 스스로를 포용한다는 것. 내 자신을 삶에게 맡기고 어린 아이가 되어서, 세상 모든 것이 의지로 컨트롤 가능하다는 터무니없는 판타지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 될 일은 잘 될 것이니, 이미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는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달콩이 소식 전하다가 말이 길어졌다.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마구 끼어들어가 가타부타하게 되었는데, 글은 글일 뿐이고, 그냥 2호점에 입주한 보송보송한 달콩이랑 교감하면 생명의 경이로움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달콩이를 보러 온 다른 논숙자들하고도 안면을 트고, 그렇게 별 대단한 것 같지 않아도 충분하게 행복할 수 있는 순간들이 많기를 조용히 바란다.


작성 2호점 논숙자

편집 김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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