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에서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를 받아볼까?
디지털 영주권, 이레지던시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 Estonian E-residency는 세계 최초로 온라인 비즈니스를 위한 디지털 ID를 한 국가의 정부가 발급하는 시도이다. 2014년 12월에 시작된 이 제도는 시작된 지 7개월 만에 4000명이 신청했고, 최근 들어서는 신청자가 12000여 명을 훨씬 넘어섰다.
이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 ID로 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디지털 사인된 계약서와 공식 문서 발행
온라인 에스토니아 회사 설립
온라인 에스토니아 계좌 개설 및 금융 서비스
온라인 결제 서비스 접속
온라인 에스토니아 세금 업무
이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가 해당되지 않는 것은 다음과 같다.
실제 에스토니아 국민으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시민권이 아니다
실제 에스토니아에서 거주 가능한 비자를 허용하는 영주권이 아니다.
실제 에스토니아 사회의 투표권 등의 사회 참여 권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EU 회원국인 에스토니아의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이렇게 간단하게 취득할 수 있다면 대박이겠지만 그런 개념은 아니다. 단지 온라인 비즈니스를 위한 제반 행정적 금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라인 계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고 흥미를 가지게 됐으나, 아직까진 이레지던시를 최종적으로 발급받으려면 에스토니아 영사관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국내엔 에스토니아 영사관이 없으므로, 가장 가까운 곳이라면 일본이나 중국 등에 가서 받는 방법이 있다.
에스토니아에서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를 받아볼까?
그러던 중 IDFA 다큐멘터리 영화제 일정으로 유럽을 가는 계획을 짜면서 '에스토니아'에서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를 발급받으면 멋지지 않을까란 상상을 했다. (사실 온라인 비즈니스 서비스의 첨병인 이레지던시를 굳이 에스토니아에서 발급받을 필요는 전혀 없다.) 오래전 유럽여행 때 들렀던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 번 더 보겠다는 핑계도 덧붙인 끝에, 저질러 보기로 했다.
https://e-estonia.com/e-residents/about/
에스토니아 정부 공식 이레지던시 페이지에서 'Apply to e-Residency'를 클릭했다.
문제는 역시나 있었다.
신청한 시점에서 에스토니아 탈린에 머무르는 일정의 마지막 날까지 3주 조금 안 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탈린에 머무는 동안 수령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담당자와 메일을 통해 발급기간에 대해선 명확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지만, 구글에서 후기들을 검색해보면 빠르면 2주, 공식적으론 한 달 정도 걸린다는 게 답변이었다. 타국으로 배송기간이 없을 탈린에서 받으면 조금 더 빠르지 않을까란 긍정적인 생각으로 일단 탈린 내로 수령 장소를 선택했다. 그리고 유럽으로 떠났다.
탈린!
11년 만에 다시 온 탈린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직 국내엔 덜 알려진 여행지였을 때 보았던 전경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전망대도 다시 올라가 보고, 야경도 보러 다녔다. 예전 방문 때는 급한 일정 탓에 충분히 즐기지 못했던 탈린의 모습들을, 한가롭게 카페에서 노닥여도 보고, 골목골목을 천천히 누비며 충분히 즐겼다. 그러다 다음 이동 일정을 앞두고 이레지던시 담당자에게 수령 날짜에 대한 확인 메일을 보내보았다.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다.
기한 내에 발급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접수하는 데만 10여 일 가까이 소비됐었다. 역시 한국의 행정서비스의 속도를 외국에서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당초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에 대한 찬/반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란게 이렇게까지 하면서 발급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어떤 면이 장점이며, 비판받는 부분은 없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장단에 대해 모두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의 발급비용은 100유로가 조금 넘는다. (100유로에 신용카드 수수료가 추가된다.)
100유로라는 비용을 재미로 발급받아보는 정도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현명한 사업가, 혹은 창업가라면 최소한의 목적은 염두에 두고 시도할 것이다.
대략 여러 리뷰로부터 정리해본 찬반양론은 다음과 같다.
Pros (찬성)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에스토니아는 EU 회원 국가란 것이다. 물론 실제 시민권은 아니지만 이레지던시를 통해 설립한 회사는 EU의 법적 체제 하에서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장점이다. 탈린에 머무르는 도중 만날 수 있던 에스토니아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이로부터 EU 시스템 내에 있어서 가지는 장점을 또 하나 들을 수 있었다. EU 국가 내의 스타트업들을 대상으로 하는 펀드 자금 규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이었다. 에스토니아 스타트업들이 EU 회원국이란 이점으로 펀딩 받는 것에 대해 크게 부담을 가지지 않는다는 얘기가 사실이라면 상당한 장점일 듯했다. 약간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최근 영국인들이 브렉시트의 여파로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를 유럽권역의 계좌를 가지고 비즈니스를 계속하는 루트로 이용하고 있다고도 한다.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행정, 금융적 서비스 기능 자체도 좋다고 할 수 있다. 온라인으로 에스토니아 법인을 세우는 절차가 매우 간단하고, 계좌 개설부터 온라인 금융업무, 세금 업무까지 전 세계 어디서 가능한 시스템이란 건 확실히 발전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는 시스템도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당장 2016년 가을 전까진, 이레지던시의 온라인 계좌 개설을 위해 실제 에스토니아 은행을 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업데이트된 이후엔 모든 과정이 영상 채팅을 통해 온라인으로 가능해졌다.
그리고 2018년부터는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가 모든 EU 국가에서 온라인 ID로 인식될 예정이며, 이레지던시 시스템에 기업의 주주 온라인 투표 시스템도 갖추는 등, 온라인 비즈니스를 위한 편리한 서비스들을 업데이트하고 있다.
현재 이레지던시 수령을 위해 에스토니아 대사관을 방문해야 하는 부분도, 대사관 외의 수령 장소를 늘린다고 하고, 발급 기간도 단축시킨다고 하니, 이레지던시 시스템에 꽤 공을 들여서 보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에스토니아는 소프트웨어 강국이다. Skype가 에스토니아에서 시작된 스타트업이란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기도 하고, 정부 행정 시스템도 소프트웨어 강국답게 발전된 측면이 있다. 은행 업무 외에 많은 행정적 절차도 정부 소프트웨어를 통해 가능하고, Paypal과 같은 결제 시스템 활용, 그리고 지속적인 업데이트에 의한 서비스 항샹에 대한 기대도 긍정적인 부분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건, 에스토니아 행정 시스템에 대한 신뢰이다. 에스토니아의 행정 및 은행 시스템은 높은 신뢰도를 갖고 있다. 아직 세금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단순 세금을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는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는 적절한 핏이 아닐 수 있다. 에스토니아보다 훨씬 적게 세금을 매기면서 법인을 세울 수 있는 세금 도피처로서의 국가들은 많다. 단 행정 및 은행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는 에스토니아와 비교하기 힘들다. 세이셸, 바누아투, 바하마... 세금 천국은 많지만 세이셸의 은행들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세이셸 밖에서 얼마나 불편한지 깨닫는 데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세금 도피처가 아닌 정상적인 온라인 비즈니스를 하려 한다면, 에스토니아의 안정적이고 믿을 수 있는 시스템은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Cons (반대)
세금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언급한 대로 에스토니아는 결코 세금 천국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크게 높지 않은 세율이라고는 하지만 독특한 세율 시스템을 갖고 있기에,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를 통해 기업을 설립하기 전에 본인의 비즈니스가 이에 적절한 지 고려가 필요하다.
에스토니아는 법인세가 없다. 벌어들인 수입에 대한 세금(소득세)만 부과하는 데, 번 돈을 재투자하는 데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비 배당금에 대한 세금 0%). 수익을 주주들에게 배당한다면 이에 대해선 20%의 소득세가 붙는다.
예시를 들어본다면, 에스토니아 회사에서 10000원을 독일인 국적인에게 배당하려고 한다면, 10000원 중 20%을 수익 배당에 대한 소득세로 납부하고 남은 8000원에 대해 독일 내의 세법에 따라 세금을 제한다. 독일의 경우엔 25%을 떼므로 2000원을 더 떼서 남은 6000원이 독일인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VAT에 대한 20%, 소셜 세금이 35%가 있으나 실제 에스토니아에서 일하는 것이 아닌 경우엔 소셜 세금은 해당하지 않는다)
이런 세금 시스템은 독특하면서도 종합적으로 보면 중간 정도 세금 부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금을 아끼려는 목적으로는 부적절하다는데 중론이다. (세금을 아끼고 싶다면 세이셸, 바누아투, 바하마가 기다리고 있다!) 단 현금흐름이나 비 배당금에 대한 0% 세금과 같은 독특한 시스템이 본인의 비즈니스와 잘 맞는다면 긍정적으로 고려해볼 만하다.
에스토니아 세금 시스템에 대한 추가 정보는 이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taxsummaries.pwc.com/uk/taxsummaries/wwts.nsf/ID/Estonia-Overview
신뢰할 수 있는 은행 시스템을 갖고 있지만, 계좌 개설이 가능한 세 군데의 은행 중 두 군데는 계좌 개설에 수백 유로의 돈을 요구한다. (SEB and Swedbank) LHV은행은 규모는 작지만 계좌 개설에 투자금을 요구하지 않으므로 더 추천되고 있다.
그리고 실제 에스토니아에 체류하고자 하는 디지털 노마드라면, 여름의 에스토니아는 낮도 길고 아름답지만, 겨울은 혹독한 날씨임을 알아야 한다. 이번 탈린 방문에서도 눈보라와 함께 살벌한 추위를 경험했다. 물가의 경우, 서유럽에 비해 식재료나 대체적인 생활비는 싼 편이지만 부동산은 비싼 편이다. 영어가 곧잘 통용되긴 하지만 에스토니아는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명한 올드 타운은 잠시 여행자로 스쳐가기엔 아름다운 곳이지만, 실제 거주하게 되면 여행객 인파에 피로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플랜 B
에스토니아에서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 발급받기란 당초의 계획은 발급 기간이 늦어지며 실패하고 말았다.
라임이 흐트러지긴 하겠지만 유럽까지 온 이상 이레지던시를 받긴 받아야 하니, 수령지를 변경해서 받기로 했다. 원래 IDFA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위한 여행이었으므로, 네덜란드에서 받으면 여행기간 내에 충분히 수령 가능할 듯했다. 사전에 알아본 바로 에스토니아 탈린의 사무실로 수령지를 해놓은 경우 한 번의 다른 국가 영사관으로 수령지 변경에는 추가 비용이 들지 않았다. 만약 에스토니아 외 다른 국가 영사관을 수령지로 지정해놓았다가 또 다른 국가의 영사관으로 재변경하게 되면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수령지 변경에 따른 비용은 추가되지 않았지만, 네덜란드 에스토니아 영사관은 IDFA가 열리는 암스테르담이 아니라 헤이그에 있는 탓에 그곳까지 가야 했다.
여행을 할 땐 고민을 하고 계획을 짜도 항상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므로, 유연하게 맞춰갈 필요가 있었다. 영화제 기간 중 하루 짬을 내어 헤이그로 출발했다.
암스테르담에서 헤이그까지 당일로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다. 이레지던시를 수령하러 영사관에 가면 지문등록과 간단한 인터뷰를 한다고 들었는데, 별 문제는 없겠지 하고 생각하며 기차에 올라탔다.
헤이그 중앙역에 내려 버스나 트램으로 금방 이동한 거리에 영사관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구글 지도로 찾은 끝에 영사관을 발견했다.
주네덜란드 에스토니아 영사관은 매우 작은 건물에 있었다. 벨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니 응답이 왔다.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를 수령하러 왔다고 하자 문이 열렸다.
사실 무비자 체류가 가능한 곳 외에 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서 영사관 방문은 처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살 같은 것으로 진입이 금지되어있었고, 왼쪽으로 내부의 영사관 직원과 인터뷰가 가능한 공간이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내려온 영사관 관계자가 간단한 인터뷰와 함께 지문 등록을 진행했다.
간단한 절차가 끝나고 그 관계자는 본인의 개인적인 질문인데 이레지던시를 어떤 용도로 쓰려는 거냐고 물었다. 온라인 비즈니스를 하고 싶어서 만들어보는 거라고 대답했고, "Ok, Great"라며 끄덕이는 걸 보고 인사하고 나왔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달 여간의 우여곡절 끝에 이레지던시를 손에 넣으니 조금 감격스러웠다.
하늘색 박스를 열어 구성 물품을 확인해보니, 사진에 보이는 이레지던시 ID카드와 실제 은행 및 행정업무를 할 때 사용해야 하는 USB 리더 형태의 접속 키트로 되어있었다. 이제 비즈니스 아이디어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주먹)
후기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온라인 비즈니스 혹은 Location Independent Business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탓도 있지만, 에스토니아란 나라에 대한 호감이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 에스토니아를 많은 사람들이 발트 3국 중 하나인 작은 나라라고만 알고 있지만, 사실은 많은 건실한 IT기업을 보유한 스타트업 강국이다. 이레지던시에 대한 여러 리뷰들을 읽으면서도, 이 것이 가지는 당장의 가치보다, IT강국인 에스토니아 당국이 앞으로 업데이트하고 발전시킬 내용에 대한 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실험적이지만 앞서 나가는 시스템에 대한 빠른 리포트를 해보고 싶었고, 마침 다른 일정과 병행할 수 있어서 시도해본 일이었다.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의 아이디어는 싱가포르, 네덜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핀란드, 일본에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고 한다. 이들 나라들은 자국의 이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진정한 IT강국, 창업강국을 꿈꾼다면 정치적인 관점에서 만들어내는 규제나 스타트업계에 대한 부족한 이해로부터 나오는 정책이 아닌 이런 트렌디하고 실질적인 행정 서비스를 발빠르게 따라가는 것 또한 필요하지 않나 싶다. 실험적이고 아직 논란은 많지만, 적어도 트렌드에 민감한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어낸 에스토니아 이레지던시가 앞으로 어떤 아이디어와 결합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모든 사진 by 논픽션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