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n finito Mar 12. 2024

멈춰 선 세계의 아침

동백에 비친 희망의 패러독스

정신이 들었다. 눈은 뜨지 않았다. 다시 찾아온 아침이다. 아직 감은 눈에는 오렌지빛이 감돈다. 눈을 떠도 좋고 계속 감고 있어도 좋은 순간이다. 눈을 감고도 맑은 날인지 흐린 날인지 감각할 수 있다. 오렌지빛이 감도는 걸 보니 세 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이 아침 햇살로 가득 채워진 날이다. 반갑게 눈을 뜬다. 이불 밖으로 발을 내놓으며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워 정면에 창문을 바라본다. 창 왼쪽에는 태슬이 달린 자수 놓인 가리개 커튼이, 오른쪽에는 하얀색 망사 커튼이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 커튼은 빛을 잔잔하게 투과시키고 오른쪽 망사 커튼은 노골적으로 빛을 들여보낸다. 나의 의도대로 햇살을 통과시켜 아침을 은은하게 누리게 해주는 것이다.


시선이 이어진 곳은 창문 아래 작은 원형 테이블 위다. 저마다 대로 놓인 생명체, 스파티필름과 동백 그리고 이 두 종의 식물보다 높은 곳에 몬스테라가 자유분방하게 제각기 뻗어있다. 동거식물에 닿는 시선은 굿모닝 인사다. 눈을 몇 번 꿈뻑이며 멍하게 한참을 바라본다. 얼마간의 순간을 즐기고 벌떡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연다. 맞은편 다른 누군가와 대화도 가능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이웃집이 있다. 그 집 꼭대기 위로 펼쳐진 하늘로부터 내리쬔 햇살에 나의 오감이 반응한 것이다. 상반신은 창밖에 내놓았고 하반신은 스파티필름과 동백을 가렸다. 광합성은 식물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두 발 달린 나부터 기지개를 켠다.


다음 차례는 동백이다. 섬 제주에서 살던 십여 년 전, 동백이 마음에 선명하게 각인된 적이 있다. 짙은 녹색에 반지르르한, 결코 찢어질 것 같지 않은 힘 있는 잎사귀와 새빨간 꽃은 그 어떤 푸르름과 붉음보다 강렬했다. 강인한 아름다움이었다. 거센 바람을 힘 있게 이기고 선 동백에 상실감에 시달리던 나를 투사하며 능동적 위로를 취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날 작은 화분에 분갈이된 동백을 집에 들였다. 화창한 날이면 창문 틈에 올려두고 동백을 들여다본다. 햇살 좋은 이 아침에도 태양을 향해 동백을 올린다.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볕 많이 쬐고 서둘러 새빨간 꽃을 보여달라는 주문이다. 꽃망울은 여러 개 달려있는데 어찌나 단단하게 입을 꾹 닫고 있는지 외부인 출입금지 경고받아 민망한 기분과 다를 것이 없다. 미동도 없다. 절대로 터질 것 같지가 않다.


이렇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동백의 꽃망울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생각나는 문장이 있다.

“벚꽃은 여름의 빛을 봄의 현재에 비추며 희망의 패로독스를 구현한다.”
- 나탈리크납,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굳게 닫힌 꽃망울, 그 내부의 세계를 향한 나의 가벼운 호기심과 섣부른 기다림이 왠지 머쓱해진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담긴 과도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꽃망울은 쉽게 범접할 수도 안달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단지 식물만 그러할까. 인간의 세계도 그러하다. 우리는 화양연화를 꿈꾸지만 꺾인다. 더 나은 미래를 안달하다 이내 지친다. 때때로 결과가 보이는 듯 하지만 그것은 진행 중에 보이는 아주 작은 매듭에 불과하다. 


여기서 다시, 철학자 나탈리크납의 말이 떠오른다.

“벚꽃은 맛난 버찌가 되기 위해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계절에 피어나는 것이 합당하기에 피어난다. 모든 성장기는 다음 성숙기를 위한 전제다. (…) 지금은 자랄 때이고, 지금은 꽃을 피울 때이며, 지금은 성숙할 때다. 나무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이렇게 희망의 시간적 역설을 실현한다.”


식물의 세계에는 종류가 다른 식생대, 생태계가 경계를 접하며 점차 양자의 요소가 서로 섞여 있는 지대를 뜻하는 ‘이행대’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상상해 보면 경계의 접점은 가장 많은 가능성이 얽혀 변이를 준비하는 특별하고도 은밀한 느낌을 준다. 자연의 일부인 나의 지금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인간의 시간도 그러므로 나의 경계적 시간도 특별하기는 마찬가지일까. 하나의 '때'를 넘어 다음 '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간 속에 있을 뿐, 세계가 사라진다고 여기는 것은 실체 없는 감정적 산물일 뿐일까. 


현재의 나는 모든 욕구가 사라진 것 같다. 어딘가를 향할 의지도, 누군가를 만나려 하지도 않는다. 삶의 고단함이 밀려올 뿐 하고 싶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움직여야 한다고 압박을 가하던 내 안의 나도 사라졌다. 마치 한 세계가 멈춘 것 같다고 느껴지는 지금은 어디쯤일까. 나탈리크납의 말을 불러들인 햇살 담은 동백을 바라보며 조금은 깊은 생각에 빠져든다. 아침, 햇살, 동백의 삼중주가 선사한 사유의 시간이 멈춘 듯 흐른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동백의 꽃망울이 터지는 그날이 이왕이면 오늘처럼 햇살 가득한 아침이길 바라본다. 나의 세계는 어두워도 좋으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