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경, 전국에 난데없이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전시나 사변 혹은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 사태가 벌어진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밤이었다. 그만큼 모두에게 황당하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경찰이 막고 있는 국회 문을 피해 담을 넘어 들어간 야당 의원들, 들이닥친 계엄군과 대치하며 시간을 벌어준 국회 직원들과 의원실 보좌관들, 그리고 국회 앞으로 당장에 달려가 군 차량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계엄 철폐를 외친 민주시민들 덕분에, 우여곡절 끝에 다음 날 새벽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라는 혼돈에 빠졌다. 해가 바뀌었고, 그 비현실적인 밤으로부터 어느덧 두 달이 지나가고 있다.
만약 계엄이 성공했다면 실행됐을 잔혹하고 치밀한 계획들 — 야당 의원, 진보 언론인, 현직 판사, 대법원장, 민주노총, 심지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까지 ‘수거’하겠다는 문건이 드러났다. 고문에 쓰일 각종 도구의 목록, 지하 벙커에 가두거나 백령도 등 외딴섬에서 처단하는 방식, 심지어 NLL에서 북한의 공격을 유도하려는 정황까지. 수많은 증언과 메모가 쏟아지며, 하루에도 수 건씩 속보가 터졌다.
계엄을 지시한 내란 수괴는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며 체포를 거부했고, 체포가 지연되면서 언제 다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모두는 속칭 '내란성 불면증'에 시달렸다. 어렵사리 체포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헌법 위에서 민주공화정 체제를 깡그리 무시하는 언사를 반복하며 선동에 가까운 메시지를 외부로 송출하고 있고 이에 화답하듯 구속영장이 발부되던 날 새벽에는 서부지법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나는 그 현장이 국회에 들이닥친 계엄군 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수괴는 결국 구속되었지만 헌법재판소에 출석한 자리에서도 뻔뻔한 태도를 보이며 거짓과 오만으로 살아보겠다는 몸부림을 보이고 있다.
매일같이 상식이 무너지는 부조리한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나는 분노와 슬픔 사이를 오갔다. 어떤 날은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결연한 마음을 다지다가도, 곧 무력감에 휩싸여 한숨만 쉬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1월의 어느 날,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라앉은 오후, 한동안 손길을 피하고 있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래, 차라리 이럴 때야말로 제대로 직면하자.”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다시 펼친 건 혼란스러운 현시국의 한가운데서였다.
침묵이 규칙인 한 카페의 정적 속에서 책을 펼쳤다. 안개꽃이 자욱한 이 커버 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잘 알기에 쉽게 넘기지 못했던 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멍해지는 순간이 잦았다. 소설 속 배경은 물론이고 인물들 내면에 흐르는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양심, 처절한 고통이 내 안의 것과 하나가 되어 과거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시대와 시대를 관통하는 시공간 어딘가쯤에서 한강 작가의 질문이 다가왔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 순간, 작가의 물음이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시대(과거)와 시대(현재), 죽은 자와 산 자 간의 연대와 연결성을 포착한 그녀의 저력을 새삼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민주주의. 텍스트 속에서만 둥둥 떠다니던 이 네 글자가 내 안으로 깊이 침투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숨 쉬는 걸 당연하게 여기듯, 이 또한 당연한 것인 줄 알았던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곱씹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흑백 기록물로 기억되는 과거에서가 아니라, 21세기 지금, 여기에서 벌어진 가상현실 같았던 계엄 선포를 통해서였다. 12월 3일 밤, 국회 앞으로 거침없이 달려 나간 시민들과 무장한 군인을 막아 선 의인들의 모습에서 생각했다. "5.18 광주가 그들을 그 앞으로 보냈구나.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는 것이 아, 바로 이거구나.."
https://youtu.be/7V1vqW-RToo?si=_G3EuILnZQ1Mz6Pg
계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아는 세대의 한 아비와 군에 있는 아들의 그날 밤 통화 내용이 세상에 알려졌다. 떨리는 음성 속에 담긴 절절한 당부는 과거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너, 잘 들어. 목숨 지키는 게 제일 중요하고, 두 번째는 민간인 공격하거나 살상하는 행위는 절대 하면 안 돼. 알았지? 소대원들 잘 지키고... 너 계엄 시에 군대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지? 절대로 민간인을 해치는 일은 하지 마. 엄마한테 빨리 전화해, 지금. 엄마 걱정 안 하게 말 잘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타고 나는 상상 속 그 시간, 광주로 이동했다.
동호의 마지막 순간전남도청 상무관으로, 정대의 혼이 스며든 검은 숲으로, 도청 앞 분수 좀 잠가달라고 말하던 은숙이 들어간 공중전화 부스로, 혼이 빨려나간 짐승과도 같았던 차갑고 공허한 두 눈을 번쩍이던 진수와 시민군이 갇혀 있던 철창살 앞으로, 끝내 녹음기를 누르지 못한 선주에게로, 그리고 내 새끼 동호의 그림자를 쫓던 어미의 옆으로...
“기관총 하고 탱크가 있는 정예부대 계엄군이, 6•25 때 쓰던 카빈총 들고 있는 시민군이 무서워서 안 들어오는 것 같냐? 작전 날짜만 보고 있는 거야. 여기 있다간 죽어.”
작은형에게 이마를 쥐어 박힐까 봐 너는 한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내가 뭘 했다고 죽어. 여기서 잔일 거든 거밖에 없는데.”
세차게 팔을 잡아당겨 너는 엄마의 손을 떨쳐냈다.
”걱정 마요, 며칠만 일 거들다가 들어갈게요.”
이제 너는 상무관 출입구의 탁자 앞에 앉아 있다.
탁자 왼편에 장부를 펼쳐놓고, 죽은 사람의 이름과 일련번호, 전화번호나 주소를 십 갱지에 큼직하게 옮겨 적는다. 오늘 밤 시민군이 모두 죽더라도 유족에게 확 실히 연락이 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진수 형이 말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여섯 시 안에 이것들을 정리해 관마다 붙여놓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동호야아." 부르는 소리에 너는 고개를 든다.
엄마가 트럭들 사이로 걸어오고 있다. 이번엔 작은형 없이 혼자다. 가게에 나갈 때 교복처럼 입는 회색 블라우스에 헐렁한 검은 바지를 입었다. 늘 단정히 빗는 커트 머리가 비에 젖어 부세부세 헝클어졌다는 것만 평소와 다르다. 너도 모르게 반갑게 일어서서 계단을 뛰어내려 가다 멈춘다.
엄마가 허접지점 계단을 뛰어올라와 네 손을 잡는다.
”집에 가자.”
물에 빠진 사람처럼 무섭게 손을 끌어당기는 엄마를 떨쳐내려고 너는 손목을 뒤튼다.
남은 손으로 엄마의 손가락들을 하나씩 떼어낸다.
”군대 가 들어온단다. 지금 집에 가자이.”
억센 엄마의 손가락을 마침내 다 떼어냈다.
너는 날쌔게 강당 안으로 도망친다.
뒤따라 들어오려는 엄마를, 집으로 관을 옮겨가려는 유족들의 행렬이 가로막는다.
”여섯 시에 여기 문 닫는대요 엄마.”
행렬 사이로 너와 눈을 맞추려고 엄마가 깨금발을 디딘다.
우는 아이처럼 힘껏 찡그린 그녀의 이마를 향해 너는 목소리를 높인다.
”문 닫으면 나도 들어갈라고요.”
엄마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꼭 그래라이" 그녀가 말한다. "해 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
정신없이 상상 속 과거 곳곳을 누비다, 아버지와 아들의 통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으며 흐르는 눈물을 타고 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계엄이 해제된 직후, 국회에서 철수하던 한 군인이 시민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하는 영상을 보면서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던 과거 계엄군의 증언이 교차했고, 지난 5월 광주를 방문해 직접 본 전일빌딩의 총탄 흔적이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동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https://youtu.be/Q7KKIK_ILtM?si=WFMRkZjFjTUvJW1m
한강은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으며,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제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한다. 역사적 고통을 언어화해서 이토록 깊고 강렬한 연결감을 자각할 수 있게 해 준 한강 작가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현실에서 맞닥뜨린 계엄을 통해 타자의 고통을 너머 나와 우리의 고통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 시련을 단지 흘려보내지 않으려 한다. 그날(과거) 그곳에 선 시민군과, 오늘(현재) 이곳에 선 시민들이 보이지 않는 등을 맞대고 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피로 지킨’ 민주주의를 가슴으로 쓸어안는다. 모두의 온전한 일상을 되찾는 그날까지 민주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
겨울, 그다음은 봄, 봄이다.
#계엄 #소년이온다 #과거 #현재 #민주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