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live Dec 08. 2024

어느 날 카톡이 왔다 “부고를 전합니다”

울고 있을 수만은 없어 활동하고 싸우고 연대합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는 이주민들의 삶은 우리가 평소에 접하기 어렵다.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수다를 떨고, 친구들과 함께 한국의 이곳저곳을 체험하며 웃고 활기찬 모습의 이주민들은 TV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종종 뉴스 단신을 통해 우리나라에 온 이주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악한 대우를 받으면 일을 하는지, 혹은 결혼이주여성들이 어떤 폭력적인 상황을 겪고 있는지, 학교에서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어떻게 교육에서 소외되고 있는지 보곤 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내 이웃, 내 아이의 친구가 아닌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흘려보내고, 그들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이러한 이주민들의 삶과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가 있다. 멀리 부산에 있어서 자주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난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그들도 우리와 다를 것 없이 일을 하고 세금을 내고 아이를 키우는 이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더불어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가, 그리고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이 그들을 온전한 이웃으로 환대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난 그녀와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눈 날, 집으로 돌아가 그녀가 일하는 연구소의 후원회원이 되었다.


김사강. 그녀는 부산에 위치한 '이주와 인권 연구소​'의 연구원이다. 이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비영리단체들도 수가 적긴 하지만, 이주민들의 인권 침해의 실상을 조사하고 연구하고, 정책을 비교하고 제안하는 연구조직은 여기가 거의 유일하다. 그녀의 명함에는 이름 옆에 '연구원', '계획학 박사'라는 타이틀이 쓰여 있기는 하나, 그녀의 내면적인 정체성은 이주민 인권 활동가에 가깝다.


이주민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지도 않고, 국민적 인지도나 거리감이 가깝지 않다. 많은 경우 '불법체류'라는 명목으로 기본적인 존엄을 박탈당하기도 하며, 상대적으로 노동, 교육, 복지 등 생활의 통계나 자료도 제대로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주민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제 이주민 당사자들의 상황이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조사 연구 자료를 통해 이주민의 목소리와 부조리한 정책을 설득 가능하게 보여주는 그녀의 연구는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그리고 그녀의 활동은 연구보고서로부터 시작해서 제도와 정책을 변화시키는 행동과 연대로 이어진다. 사실 연구보고서 보다 이후의 ‘행동과 연대‘가 활동의 핵심이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한 2006년에 만난 중학생 꼬마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강태완입니다. 태완은 다섯 살 때 엄마를 따라 몽골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미등록 이주아동이었습니다. 몽골 이름 Taivan 대신 태완으로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박사 학위를 받고 이주와 인권연구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태완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어가 모국어이고,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배우며 자란 태완 같은 아이들이 체류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언제라도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이 현실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연구만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싸우는, 연구하는 활동가, 활동하는 연구자가 되었습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이 일반적인 연구소의 연구원이나 대학교의 교수가 되지 않고, 인권활동가로서 일하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Challenging Migrant Worker Policies in Korea: Settlement and Local Citizenship'(한국 이주노동자 정책의 도전: 정착과 지역시민권에 대해)이다. 논문을 위한 연구 조사를 위해 그녀는 한국의 이주민 단체에서 6개월간 활동가처럼 일하며 그곳의 이주민들의 마음을 열고 인터뷰를 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그때 자신과 인터뷰를 했던 이주민들과의 대화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논문이 뭐야? 책 같은 거야? 그 책이 나오면 우리 생활이 더 나아질 수 있어? 우리 아이가 한국에서 계속 살 수 있어?


이 물음에 그렇게 될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대답하고 인터뷰를 했던 그녀는 박사가 되고 한국에 돌아와 도저히 다른 길은 선택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대화가, 그 질문이 변화를 만들기 위해 몇 년이 걸리는 지난한 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자신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정리했던 사회문제에 대해서 외면할 수 있고 더 쉬운 길을 갈 수 있지만 그 선택을 하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이었다. 김사강 활동가는.


“저에게 태완은 이주노동자도, 몽골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태완은 이주아동이었고, 한국어밖에 못하는 군포 출신이었습니다. 저는 태완의 성장을 지켜보았고, 태완과 태완 같은 이주아동들이 한국에서 체류하며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아가며 지난 18년간 활동해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태완에게 Taivan이라는 이름이 찍혀있는 외국인등록증이 아니라, 강태완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주기 위해 활동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완이 떠나버렸습니다. 저는 이제 무엇을 위해 활동해야 할까요?”


11월 어느 날, 김사강 님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부고를 전합니다”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의 활동의 시작이 되었던 이주아동이, 그녀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정책을 통해 몽골로 나갔다가 다시 한국에 들어와 공부하고 일을 하며 체류 자격을 얻고 열심히 살아가던 이주노동자 강태완 님이 산재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활동을 시작했고 어떤 힘으로 지속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상황이 얼마나 버겁고 가슴이 아플지에 대해서 감히 상상을 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이주민', '이주아동'의 삶과 노동과 인권에 대해서 알 수 있었고, 고민을 할 수 있었고, 연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지인으로 들어온 김사강 님과 그녀의 활동이 매개가 되었다. 내가 강태완 님을 생전에 만나고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그의 죽음이 너무 마음이 아프고, 그의 죽음에 대해 명확히 정리되지 않고 정리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회사와 정부부처에 대해 화가 났다. 김사강 님과의 연결로 '이주민'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가시화되고, 연대의 마음과 행동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면, 태완님의 소식은 나에게 한 '이주노동자' 개인과의 구체적인 연결을 만들어준 것 같았다. 마음을 추스르고 이어지는 사강님의 활동에 깊은 지지를 하고 싶었고, 태완님의 명복을 빌며 부조금이라고 생각하는 금액을 후원했다.


”태완은 저에게 정말 자랑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였습니다. 제가 죽으면 저를 추억하면서 눈물을 흘려줄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도 아까운 사람이 갔습니다. 허망하다, 비통하다, 참담하다는 말로는 제 심정을 다 표현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태완이 남기고 간 숙제가 있기 때문에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태완이 당한 사고가 철저히 조사되고, 진상이 밝혀지고, 책임자가 처벌받고, 다시는 이런 억울한 죽음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그녀로부터 태완님의 소식을 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주말 가족들과 부산을 찾았다. 혹시 사강님이 부산에 있을까 싶어, 부산에 있으면 잠시 그녀가 사는 곳 근처에서 만나 꼭 한번 안아주고 따뜻한 커피를 한 잔 하고 싶어 전화를 했다. 그녀는 여전히 태완님의 엄마와 함께 그가 산재로 사망한 회사가 있는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산재로 처리되는 과정과 그 이후의 회사의 사과, 책임자 처벌 등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태완님의 죽음으로 그녀의 활동에는 '산업재해'라는 영역이 추가되었다. 그래도 목소리라도 들으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근데, 올리브. 제가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김용균 님 어머니셨어요. 소식을 듣고 꼭 태완이 엄마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순간 갑자기 울컥했다. 같은 고통으로 연결되는 당사자 간의 깊은 연대가 줄 위로가 상상이 되었다. 참 다행이다 생각이 들었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에 끼이는 사고로 사망한 김용균 님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이후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비정규직과 안전한 노동 환경을 위한 활동을 계속 해오셨다고 한다. 그러나 2024년 3월 김용균 님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만에 대법원은 당시 태안화력발전소 대표자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보이지 않은 사람을 우리 눈에 보이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우리 귀에 들리게, 그래서 그 존재를 알고 연대할 수 있게 하는 사강님의 또 다른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태완님의 죽음에 대해 진상을 밝히기 위한 그녀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연대하는 단체, 개인들과 추모 현수막을 만들어 그 회사를 에워쌌고, 그곳에서 함께 추모제를 진행하였습니다. 태완님은 아직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녀의 활동과 연대를 통해 이주 아동이었던, 우리 아이들의 친구였고 함께 일하는 동료였던, 한국 이름이 새겨진 주민등록증을 꿈꾸었던 청년 강태완 님과 그의 가족들이 억울함 없이 장례식에서 인사 나누고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억울한 죽음이, 앞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그 죽음이 멈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와 같은 미등록 이주 아동, 청소년들이 한국에서 안전하게 교육받고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사강 님의 활동과 지금 진행 중인 강태완 님의 사고에 대한 이후 소식들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응원해 주세요.

​​​김사강 활동가가 일하는 ‘이주와 인권 연구소’ 홈페이지

강태완 님의 부고를 알린 ‘이주와 인권 연구소’ 뉴스레터​

엄마, 왜 병원 밖에서 울어…입사 8개월 만에 죽음으로 끝난 한국살이​ | 한겨레 (24.11.11)

영주권 눈앞에 두고…산재로 꺾인 몽골 청년 '강태완의 꿈'​ | JTBC (24.11.22)

이주청년 산재사망 유족 "회사가 노동자 탓만…원인 규명하라"​ | 연합뉴스(24.11.05)


강태완님이 생전에 출연했던 “Let Us Dream” 캠페인 영상. 이렇게 그는 어렵지만 여기서 꿈을 꾸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