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보고 무력감을 느끼다가
세상이 정의롭지 않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무력감과 분노를 느낀다.
악인들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고 싶고, 누군가 대신 그들을 처벌해 주길 바란다.
손이 닿지 않는 대상이기에, 악플이라도 달아야 속이 시원하다.
‘더 글로리’, ‘국민사형투표’, ‘약한영웅’ 같은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 정의롭기를 바라며, 카르마를 믿는다.
우연히 나쁜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을 카르마(업보)라 부르며 안도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권력을 쥔 악인들은 법을 바꿔가며 처벌을 피하고, 솜방망이 징계를 받는다.
때로는 사람들을 갈라치기하여 자기 죄를 덮는다.
법은 통쾌함을 주지 않는다. 정의보다는 질서 유지를 위해 작동하고, 정의는 거기에 뿌려진 깨소금 같은 존재일 뿐이다.
먼저 세상이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체념일 수 있지만, 마음에는 평화를 준다.
우리가 나쁜 사람을 미워할 때, 실제 피해보다 정의롭지 않은 현실이 주는 모욕감이 더 크다.
“저런 사람이 왜 나보다 잘 살지?”
“왜 저 정치인은 벌을 받지 않지?”
분노는 정당하지만, 오래 품으면 나 자신을 좀먹는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남의 삶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에서 벗어나야 한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의 삶뿐이다.
세상은 불합리하고, 목소리를 내더라도 세상이 그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때마다 분노와 무력감에 빠지면, 결국 나만 지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외부 사건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감정의 거리두기’를 훈련했다.
니체는 복수심에 사로잡힌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며 경계했다.
이는 무감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분노해도 된다. 상처받아도 된다.
다만 그 속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나를 돌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복수하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 것.
불공평한 세상에 상처받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으로 남겠다고 다짐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