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도 장비 탓을 한다
작년, 겨울 베트남 냐짱(나트랑) 여행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오른 해외로 가는 비행기
여행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시작된 여행이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는…
비행기 안에서 맥주를 마시고 책을 읽다가 멀미를 했고,
비행기에서 내려서도 헤롱헤롱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공항에서 백팩을 잠깐 벗어 놓은 사이에 누군가가 들고 갔다.
상태가 좋지 않아서 챙길 정신이 없었나 싶다.
다시 공항 분실물 센터에도 가보고
택시에 놓고 내린 게 아닌 가 싶어서
택시 기사와도 연락을 해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거의 하루를 다 날렸다.
가방 안에 있던 노트북은 물론이고,
필통 등 항상 애지중지하며 가지고 다니던 물건들까지 한 번에 잃어버리게 되었다.
노트북이 가장 마음이 아팠지만 그다음으로는 만년필들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다.
필통에 몽블랑, 워터맨 등등의 만년필들이 있었는데
모두 한 번에 잃어버렸다.
나는 만년필을 좋아한다.
어떤 펜을 쓰더라도 문구덕질의 종착지는 제트스트림이라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제트스트림을 오랜 기간 쓰다가 만년필에 빠진 쪽이다.
일반 필기구와는 다른 고급진 맛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힘을 많이 안 들이고 쓰는 맛도 있다.
물론, 편리성으로 따지면 다른 펜들을 이길 수 없다.
만년필은 여러 모로 불편한 점이 많다.
만년필은 뚜껑을 열어 놓으면 잉크가 말라서 바로 쓸려고 해도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바로바로 떠오르는 생각을 종이에 옮기기에는 불편하다.
잉크가 마르면 몇 번이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줄을 그어야
그제야 잉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만년필을 쓰면서 주객전도에 빠지곤 한다.
무엇인가를 쓰기 위해서 만년필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만년필을 쓰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쓴다.
만년필의 잉크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묘한 쾌감을 느낀다.
나는 만년필 잉크 카트리지를 쓰는데, 카트리지 하나를 다 쓰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장인은 장비가 좋지 않더라도 좋은 퍼포먼스를 낼 수 있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것이고,
실제로 대부분의 장인은 장비도 비싸고 좋은 것을 쓴다.
거기에다가 조금만 더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렇다.
장인은 장비를 탓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장인이 아니고,
장인이 아닌 사람은 장비를 탓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나는 장비 탓을 좀 하겠다.
무엇을 배우든 간에 초반에도 장비가 중요한 것 같기는 하다.
적어도 하자가 있는 물건을 사용하면 안 된다.
자신이 초보여서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장비가 좋지 않아서 그런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면
실력 향상에 방해가 될 것이다.
또한, 장비가 동기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림을 하나도 그리지 못했는데
아이패드 프로를 선물 받고 나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만년필로 써도 어차피 노트북으로 옮겨 적어야 하기 때문에
비효율적이지 않을까 싶다가도
만년필이 주는 손맛 또한 포기하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