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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군가의K Sep 21. 2020

이름 모를 너에게 쓰는 편지

낯선 이가 건네는 쓸쓸한 위로가 담긴 그 영화

살면서 한 번쯤은 자판기에 성질이 났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멀쩡한 돈을 꿀꺽 삼켜놓고는 태연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다든지, 딱히 구깃구깃하지도 않은 지폐를 계속해서 뱉어낸다든지 해서 황당했던 경험 말이다. 나는 심지어 자연스레 밑으로 굴러 떨어져야 할 음료수가 투명한 진열창과 진열대 사이에 절묘하게도 비스듬히 끼어버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적도 있다. 마시지 못할 그 음료를 한참 노려보다가 수업시간에 늦을세라 황망히 강의실로 뛰어갔던 그 날이 아직도 황당하다.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영화 <데몰리션>에도 이런 행패를 부리는 자판기가 등장한다. 병원 자판기에서 뭐 좀 뽑아 먹으려다 나와 매우 비슷한 경우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주인공 '데이비스'를 보며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 내가 저 기분 아주 잘 알지.'라고 치부하기엔 데이비스의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었다. 어떻게든 자판기 속 스낵이 배출구로 떨어져 어서 데이비스의 손에 쥐어지길 바랐던 것 같다. 결국 데이비스는 자판기에 붙어있는 무언가를 휴대폰으로 찍더니 빈 손으로 조용히 병원을 떠난다. 그는 무엇을 찍은 것일까?


집으로 돌아온 그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편지를 보낸다. 수신자는 그가 찍은 사진 속에 담겨있는 것 같은 자판기 회사의 고객센터. 대형마트나 관공서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고객의 소리' 쪽지 같은 것일까? 데이비스는 동전을 넣고 피넛 m&m을 눌렀으나 유감스럽게도 안 나왔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판기의 문제를 알린다. 하지만 이 편지는 '배가 많이 고팠던 상황이라 짜증이 났으니 어서 기계를 고쳐주고 보상을 해달라'는 타당한 민원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절망을 써서 보내기 시작한다. 아니다. 사실 그는 그저 자기 자신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써서 보낸다. 읽는 이가 누구든 절망으로 읽힐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을 뿐. 그러다 새벽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으며 데이비스의 '데몰리션'이 시작된다.


전엔 못 보던 것들이 갑자기 눈에 띄기 시작해요.
어쩌면… 보긴 봤는데 무심하게 본 거겠죠.
장 마크 발레의 고요함을 사랑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주변의 그 누구에게도 못 할 말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우수수 쏟아낼 수 있을 때가 있다. 이 영화는 상실의 늪에 빠진 데이비스에게 캐런이라는 낯선 인물이 나타나 '젠가' 게임을 시작하는 영화이다. 쌓아 올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게 특이점이다. 무감각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에게, 고요한데 시끄럽고 미지근하다가도 불쑥 뜨거워지는 이 영화를 선물하고 싶다. 데이비스를 연기하는 제이크 질렌할의 텅 빈 눈에 미소가 번지는 순간이 올 수 있을지 옆에서 같이 지켜보자고 말해주고 싶다.




오늘은 음식이 너무 짜네요. 이 문장은 두 번씩이나 잘못 배달된 점심 도시락을 싹싹 긁어먹은 한 남자가 도시락 통에 적어 넣은 쪽지의 내용이다. 내가 준수한 요리 실력으로 도시락을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기껏 만들어줬더니 뭐라고 이 자식아? 하지만 도시락을 싸 준 '일라'라는 인물은 욕지거리 한 번 없이 더 정성스레 도시락을 싸서 보낸다. 간단한 편지와 함께. 영화 <런치박스>에서는 주인공 일라가 남편에게 싸준 도시락이 배달사고로 뒤바뀌며 낯선 두 사람의 '도시락 필담'이 시작된다.


인도에는 일하러 나간 남편의 점심 끼니를 위한 아내의 도시락을 배달해주는 시스템이 있다는 걸 이 영화를 보고 알았다. 출근하는 남편의 손에 도시락을 들려서 보내면 될 것을 왜 배달업체를 통해 점심시간에 때 맞추어 보내고, 퇴근 전에 빈 도시락통을 미리 받아오는 것일까? 이 영화는 그 궁금증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허나 분명 그럴듯한 사회문화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도시락 배달 문화가 있는 이 곳 뭄바이에서 도시락이 잘못 배달되기 시작하며 어떤 묘한 인연이 생겨나는 건 참 흥미롭지 않은가?


이르판 칸이 연기하는 '사잔'이라는 인물은 아내를 여의고 은퇴를 앞둔 베테랑 회사원이다. 그의 일상은 어쩐지 생동감 없이 회색으로 물들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어느 날 집 앞 가게에서 정기적으로 배달시켜 먹는 그저 그런 맛의 점심 도시락이 너무나 맛있는 거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하고 말 줄 알았던 특별식은 하루, 이틀이 지나도 계속된다. 도시락이 뒤바뀌어 배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일라와 사잔은 구태여 바로 잡지 않는다. 애초에 두 사람은 공허한 회색의 벤 다이어그램에 함께 속해있었고, 도시락을 통해 서로를 알아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목소리도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의 필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가끔은 잘못 탄 기차가 우리를 목적지로 인도한대요.
이르판 칸을 추모하며 영화 런치박스를 떠올린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이 영화는 인도영화이지만 흔히 발리우드 영화라고 했을 때 우리가 떠올리는 요소들과는 거리가 있다.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노래하고 춤을 춘다든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를 만큼 화려한 색감의 미장센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이 영화는 천천히 침잠하던 두 사람이 물속을 뚫고 굴절되어 들어온 한 줄기의 빛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어 수면 위를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과연 두 사람은 그 빛을 쫓아 다시 삶을 향해 활기찬 헤엄을 시작할 수 있을까? 가끔은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한다는 사잔의 말처럼 우연이 필연이 되는 마법 같은 일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2020년 9월 추석을 앞두고

연휴에 어떤 영화를 볼까 고민 중인 K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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