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아가게 한 그 영화
충만한 마음으로 구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동경한다. 물론 그네들도 어느 한 켠에 감춰둔 속사정이나 쉬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얼룩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그저 여러모로 햇살 같은 사람인 것이다. 어쩌다 그런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나면 신기하게도 삶의 의지가 생겨난다.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인 가족이라는 존재에게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있다. 상처가 아물기까지 유난히 많은 피를 흘렸던 것 같다. 그런 종류의 출혈은 끈질기고 집요한 면이 있어 완전한 회복에 애를 먹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괜찮아지기 위해 무던히 눈물을 삼켜내던 과거의 어느 날, 나는 햇살 같은 '아도니스 크리드'가 등장하는 <Creed>라는 영화를 만났다.
<Creed>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방황하던 복싱 챔피언의 아들이 먼저 세상을 뜬 아버지 대신 아버지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인물에게 복싱을 배우며 성장해나가는 영화'이다. 복싱과 성장영화라는 점에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연상되기도 하는 이 영화는 평범한 서사에 그저 그런 스포츠 영화로 흘러갈 수도 있었지만 반짝이는 챔피언 꿈나무 '아도니스 크리드'가 극을 이끌며 특별함을 보여준다.
이제는 꽤 유명세를 얻은 마이클 B. 조던이 연기하는 크리드의 매력은 포기할 줄 모르는 '집념'에서 출발한다. 어떤 죄책감으로 혹은 어떤 허무함으로 가르침을 거부하는 아버지의 친구를 쫓아다니며 끊임없는 구애 작전을 펼친다. 일상은 유쾌함으로, 난관 앞에서는 진중함으로 승부하는 복서 크리드의 쉐도잉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삶의 의지가 샘솟는 듯했다.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전환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이 인물은 영화를 보고 있는 내 마음의 짐마저 가벼운 솜털로 바꿔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루하루의 삶이 버거운 사람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은 이유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세게 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맞든 계속해서 전진할 수 있느냐야.
<Creed>는 인물 중심적인 영화인 만큼 보는 이가 즐거움을 느꼈다면 중심인물을 매력적으로 연기해낸 배우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군더더기 없는 세련된 연출 또한 잘 만들어진 이 영화의 완성에 큰 몫을 한 것 같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블랙 펜서>에서도 함께했던 라이언 쿠글러×마이클 B. 조던 조합의 새로운 작품을 또 만나보고 싶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말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책상 한 귀퉁이에 이름과 함께 motto를 적게 했는데, 덕분인지 때문인지 나는 3년 동안 저 문장과 일상을 함께 했다. 학년이 바뀌어도 일말의 고민 없이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적어 넣었다. 성장기에 어떤 까탈스러움이 발동했는지 그 어떤 문장도 저 말을 대체할 수 없었다. 지금은 결과도 과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당시에는 과정이 좋으면 결과는 필연적으로 좋을 수밖에 없다고 철석같이 믿는 청소년이었지 아마.
과정에 아무리 애를 써도 결과가 시궁창 같을 때가 있다. 살다 보면 생각보다 그런 경우가 많고, 우리는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 결과가 어찌 되든 말이다. 이처럼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끝까지 해내려는 인간 군상을 담아낸 작품이 있었으니, 그 제목부터 꾸역거리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이다. 타이틀부터 당신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는가? 대체 카메라를 멈추면 왜 안 되는 건데,라고 묻는다면 이 영화 포스터의 문구를 빌려 이렇게 대답하겠다.
이 영화는 생방송 원 테이크 좀비-액숀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기록적인 폭염이 지속되던 2018년의 여름 끝자락에 보았다. 그저 좀비가 나오는 일본 영화라는 것과 포스터만 봐도 병맛스럽다는 두 가지 사실만을 습득한 채로 상영관에 들어선 나는 그 날 충격에 휩싸였다. 조지 로메로가 천국에서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처음 뱉은 마디가 무엇일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달까. 생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자극을 불어넣어준 낯선 이름의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아마 그때의 나는 ‘순전히 내가 좋아서, 내가 재밌어서 만든’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어떤 감격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촬영은 계속된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했던 나의 청소년기를 돌아보게 해 준 이 영화는 웰메이드라고 부르기엔 분명 무언가 엉성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재기 발랄함이 넘치고, 감독이 자신만의 리듬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간다는 점에서 엄지 손가락을 추켜올리게 된다. 나는 엉뚱함도 때로는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를 통해 배웠다. 행여나 이 글을 읽고 이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면 딱 한 마디만 해주고 싶다. 멈추지 말고 반드시 끝까지 볼 것!
2020년 9월
영화관에 가고 싶은 K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