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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논 Jan 17. 2021

사이버펑크

2021년 1월 16일 토요일


먼 과거에는 현실을 베이스로 소설이나 이야기가 쓰여지던 시대도 있었던 것같다. 적어도 위대한 개츠비나 호밀밭의 파수꾼이 나오던 시절 까진? 텍스트 기반의 컨텐츠가 성행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남성이 여성에게 프로포즈 할 때 꽃을 들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친밀한 관계에 꽃 선물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라는 아주 단순한 현실적 베이스에서 작가의 경험이나 상상력이 붙어 절절한 순애보 소설이 된다거나. 컨텐츠가 제공하는 판타지와 현실의 베이스가 주객전도 되기 시작한 건 아마 미국 기준으로 50년대 기점 이려나? 냉전으로 접어들고 미디어 산업이 몸집 커질 때 쯤.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수많은 미디어에 영향 받고있는 내 자신이 신기해서다. 로맨스 물로 예를 든다면 현실에서 이런 사랑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영감을 받은 컨텐츠가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미디어를 답습하고 답습한 또다른 세계처럼 보인다. 마치 디지몬 세계에서 자란 디지몬 처럼 말이다. 사랑은 저래야 될 것만 같고, 24시간 카톡을 해야할 것만 같고, 도시락을 싸야될 것 같고, 얼마의 돈을 들여야 할 것 같고, 반드시 이성애여만 할 것 같지만 모든 관계가 규격화 되어 전시 된 그 곳은 나와 동떨어진 다른 세계 같다. 물론 거기서 제안하는 유형은 사랑 뿐만이 아니라 삶과 가족, 사람의 외모 등 여러가지가 있다. 미디어가 어떤 이상을 제공하고 현실의 우리가 허겁지겁 쫓아가는 행색이라고 해야되나. 그런 모습이다.


매일 보고 먹는 컨텐츠의 성질은 영양소처럼 내 정신 건강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하는 편이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장 수동적으로 받아볼 수 있는 종류의 메이저 컨텐츠 들의 성질은 어떠할까? 요즘 트렌드는 호흡이 과거에 비해 무척 짧아졌고 컨텐츠 자체가 마케팅의 성질을 갖고 있기도 하다. 기사 한줄을 읽더라도 광고에 노출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파편화 된 이미지들에 무작위로 노출되어 어느 것 하나에도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고, 미디어는 공감되지 않는 삶을 전시하는 그런 곳인 듯 하다.


아마 이러니까 우울증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거 아닐까. 하는 결론이 나오는데.


정말 우리가 옳다고 생각해서 선택하고 있는지 미디어에 진심으로 공감하고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가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편하게 생각하면 여기는 결핍을 낳을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니 좀 어이 없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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