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3일 토요일
디지털 공간이 무법지대라고 믿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런 착각이 들었던 때도 있었다. 이곳이 현실과 동떨어진 무한의 가상 공간일 것 같은 판타지. 어떤 규제도 명확한 체계도 없는 디지털 세상을 만났을 때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고 실수하기도 했던 것 같다. 이곳의 무질서함은 모두에게 모호하고 다소 불안정하게 다가왔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까지 과도기였다면, 난 바로 그 똥물을 그대로 먹고 자란 세대였을 것이다. 컴퓨터를 한 시간이 많았으니 그만큼 인터넷을 통해 부정적인 경험도 많았다. 이걸 어디까지 가볍게 소비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무척 과몰입 하기도 했다.
한때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영화나 책만 보거나 그 외엔 인터넷만 하며 허송세월 한 적이 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땐 인생의 암흑기겠지만 나에겐 꽤 진귀한 경험이라고 여기는 시기다. 어떠한 목적성, 의지도 없이 부유하는 유기체처럼 그냥 '존재'만 한다는 게. 나름대로 꽤 특별한 경험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도 안 왔고 내키지 않는 데 억지로 살고 싶진 않았다. 갈피 못 잡고 붕 떠있는 정신을 어디라도 묶어둘 곳이 필요했기에 인터넷에 그렇게 매달렸지 싶다.
오늘 <내언니전지현과나>라는 영화를 봤다. '일랜시아'라는 유행 지난 게임에 남아있는 그 유저들의 이야기다. 운영자조차 15년 넘게 방치한 이 게임에는 매크로나 사기꾼들이 판을 친다. 그럼에도 다른 게임과 차별화되는 몇 가지 포인트가 있는데 바로 레벨업 시스템이 없다는 점이다. 이 게임은 미용사, 요리사, 낚시꾼, 모험가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퀘스트를 깰 수 있다. 타 게임보다 경쟁 시스템이 덜하고 구체적 목적성이 뚜렷하지 않은 커뮤니티 성향이 짙은 게임이다. 유저들은 인터뷰를 통해 각자의 이유로 현실의 삶에 지쳐 가상 세상으로 도망 온 이야기를 하나 둘 푼다. 듣다 보면 솔직히 100퍼센트 공감 가지 않는 부분도 있고 전적으로 멋진 선택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치 않다.
재밌었던 부분은 이 딱딱한 기계에 비치는 화면이 뭐라고 거기서 향수를 느끼다 못해 감정적 유대까지 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어쩐지 몹시 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자비하고 피곤한 온라인 공간 속에서 다소 유약하지만 타인과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면들이, 내게도 있었고 저들에게도 있다면 '아, 이 허기진 기분이 공유되는 감정이구나' 싶어서다. 다크 템플러나 가오나시처럼 디지털 공간에 매달리는 심리적 기저에 있는 것은 외로움 일 수도 있겠고 공허함일 수도 있겠다.
다른 사람의 언어 속에서 과거에 내가 겪은 고민들을 조각조각 발견할 때가 있다. 대단한 표현을 붙이기에 조금 구차하다. 이 나약하고 부끄러운 조각들을 타인의 감정 안에서 무심하게 마주칠 때에 무척이나 따뜻하고 내밀한 안부 인사처럼 다가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