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간 기계/기술 존재에 대한 짧은 고찰

명료성이라는 동일률의 원칙과 위계적 의미체계에 대한 비판과 함께..

by nonoodlenolife


하나의 정답을 내놓기 위한 노력과 그 정답을 따를 뿐인 시도들. 명료하게 증명될 수 있음과 그 증명으로 도출된 하나의 의미구조를 해답으로 따르는 일의 편의성. 이는 우리를 단순한 알고리즘적 사유의 전개 그 이상으로는 안내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끊임없는 알고리즘적 사유와 사실상 주체적인 사유 없는 단순한 알고리즘적 행위들이 주는 명료성은 너무나도 간편하고 편리하다. 그러나 하나의 정답이 있다는 믿음과 명료성에 대한 숭배는 서로 다른 대상 간의 맞고 틀림에서의 쉴 틈 없는 비교를 낳는다. 그 비교를 시작으로 납득 가능한 근거들을 수집해 합리적(이어 보이는) 원칙들을 마련하고 그에 대한 동의 혹은 비동의라는 입장 정리의 과정을 차례로 밟게 하는 것은 우리를 획일화와 균질화의 논리로 들어서게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동물은 정신, 마음, 영혼이 없는 기계였다. 인간만이 육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은 인간에게 이성과 의지를 가능케 해주었다. 이성은 인간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만드는 근거가 되었는데, 그러한 점에서 스스로의 권리를 말하지 못하는 비인간 동물은 (데카르트가 보기에는) 이성과 의지를 갖지 못함은 물론이고 고통도 느낄 일 없는, 정신과 마음이 부재하는 기계에 불과했었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인간 이외의 종을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었던 것은 이성을 기준으로 하는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의 명료성에 있었다. 하나의 완결된 명료성은 그 명료성이 비호하는 원칙 속에 포섭되지 못하는 타자와 나머지 존재를 남겨두며, 그들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수월하게 만든다.


인간과 기계/기술 사이의 관계를 보자. 프랑스의 기술철학자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은 인류가 새롭게 겪는 새로운 기술, 기계에 대해 호기심(첨단성과 유용성에 대한 예찬)과 공포(로봇같은 첨단 기술이 인간에게 적대적일 것에 대한 우려)를 동전의 양면처럼 갖고 있으며, 이 두 가지 모순된 태도의 합의점으로서 기계/기술을 인간을 위한 노예로 수단화해버린다고 말한다. 기계와 기술이 행하는 나름의 의미작용들은 무시한 채 그저 인간에게 예속된 대상쯤으로, 그 고유한 존재방식을 무력화시킨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과 로봇 기계, 즉 '비인간 기계 지능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공포라는 동전의 양면에서의 뜨거운 논의들이 계속 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진행된 한 연구의 결과가 매우 흥미롭다. 인공지능과 관계를 맺는 일에 있어서 인공지능이 여성형 혹은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인간-실험자가 느끼는 관계의 친밀도가 보다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굉장한 시사점을 주는 결과가 아닌가. 사회 속 상대적 약자의 모습을 닮은 기계가 기계사용자에게 거부감을 낮추고 접근성을 높게 한다는 사실. 이는 곧 기계/기술과 '관계'를 맺는 일이 권력화되어 있다는 의미가 되겠다. 좀 더 확장시켜보자면, 위계구조가 우리 사회에서 관계를 구성하는 어떤 명료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연구는 인간 대 기계의 관계를 들여다 보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사실은 사회 안에서 관습화된 구성원들 간의 위계적 관계맺기가 기계에 대한 사고방식을 통해 반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인간과 기계/기술 사이에 위계를 나누며 그것들을 철저히 수단화하고 타자화하려는 것은 인간을 동물보다 더 귀한 존재로 여겼던 17세기의 데카르트적 명료성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를 넘어, 자연히 우리 사회 안 기계/기술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 사이의 위계적 구분짓기로도 이어질 것이다.


인류는 역사를 거듭해 오면서 언제나 타자에 대한 위계적 구분을 구조의 토대로 삼아왔다. 인간과 기계/기술 사이의 관계는 현실에서 드러나는 우리 인간들의 관계를 그대로 닮기 마련이다. 점점 더 인간의 능력과 외관을 모방해가는 비인간 기계/기술 존재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편입되어 올 때, 인간 사회가 겪는 편견과 불평등과 위계질서가 어떻게 반복되고 재연될지. 그것은 결코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더 나은 미래와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타자 존재들에 대한 '명료함이라는 둔감함'의 폭력을 중지시켜야만 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구원을 위한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