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확신
정신과 약물의 도움을 받고 점차 마음에 안정감이 들기 시작할 때마다 여지없이 드는 위험한 확신이 하나 있다. 더 이상 매일같이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나는 괜찮을 것만 같다는 확신. 나는 이 확신이 어쩌면 일종의 자학에의 욕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결코 '스스로 안정적'이지 못하다. 그러니까 어떤 게 안정적인 삶의 모습인지 안정성 자체에 대한 이해는 있지만, 안정감에 대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실천과 신뢰는 없는 상태인 것이다. 오랜 시간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불안이 더 익숙해왔기 때문이다. 속되게 말하자면 머리에 힘주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달래고 안정성에 대해 타협해내지 않는 이상 나의 자기불신은 계속해서 그 음울한 얼굴을 내비치며 나를 불안으로 이끌도록 고갯짓을 할 것이다. 내가 나를 향해 쳐든 불신의 얼굴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그 얼굴이 주시해온 내 마음은 이미 관성적인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복약을 중단하면 얼마 못 가서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해질 텐데, 그렇다면 단약에 대한 욕구는 자학적 욕구임에 틀림없다.
정신과 약을 이제 그만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 앞에서, 만일 단약을 한다면 그 후에 펼쳐질 내 상황이 어떤 모습이려나 잠깐 생각해봤다. 하루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복약을 해온 수일의 감각에 기대어 하루쯤은 단약의 티도 나지 않게 잘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날부터는 돌연 내 머릿속에 마술사가 쓰는 높다란 실크모자 하나가 뒤집힌 채 놓여질 텐데, 결코 가까이 가서 살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일단 최대한 경계하며 하루의 일과들을 처리해 나가지 않을까. 하지만 수상한 모자의 등장으로 며칠 동안은 기분이 영 찜찜하고 거슬릴 것이다. 그리고 닷새쯤(빠르면 나흘째?) 되는 날 밤, 잠에 들기 전 완전히 무방비해진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무슨 충동에서인지 그 수상한 모자 안을 들여다 보게 될 것이다. 그때 모자 안에서 토끼 한 마리가 튀어나오는데 분명 내가 아는 얼굴을 하고 있다. 내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면서 또 내가 가장 미워하는 나의 어떤 지난 얼굴. 토끼 한 마리를 시작으로 길다란 오색의 리본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 리본에는 나의 별의별 지난 과거들이 아주 상세히 적혀 있다. 리본을 따라 내 기억이 끝도 없이 소급해 가는데, 그 기억들이 치사할 정도로 자세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기억 하나하나마다 따라오는 후회와 자책들.
그 사람을 그렇게 대하지 말았어야 해. 그 일을 그렇게 끝내지 말았어야 해. 그 상황에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았어야 해.
......
약은 결국 모자를 바로 쓰는 걸 도와주는 수단인지도 모르겠다. 모자를 똑바로 쓰고 앞으로를 똑바로 보도록 돕는 가루(의 압축 형태). 그리고 나는 뒤집혀 있던 모자를 제대로 돌려놓는 일에 이제 겨우 막 성공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뒤집힌 채 온갖 잔여물을 토해내던 내 모자가 겨우겨우 똑바로 세워진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전에 없던 안정감 비슷한 걸 느끼는 중인 게 아닐까.
스스로 모자를 집어 들어 머리 위에 멋지게 쓴 내 얼굴을 보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걸까. 약에 의존한 형태로 안정을 느끼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를 위하는 정답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타협의 형태로 끝나는 것 같다. 일단은 이게 최선이라고. 단약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확신은 허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