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VS 마이너
“한국에서 미국으로 와서 공부하는 건 네가 메이저에서 마이너가 되는 큰 변화였겠구나.”
우리 학교의 한 교수님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인터뷰를 하다가 끝날 때쯤 그 교수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었다. 워낙 바쁜 분이었고, 인터뷰가 끝날 때쯤 나온 이야기라서 그냥 웃어넘기고 그 교수님 방을 나오게 되었지만, 시간이 있었으면 나는 분명히 “저는 한국에서도 메이저였던 적은 없어요.”라고 말을 했었을 것이다. 사실 이 교수님은 해외에서 온 유학생에 대해서 이해도도 높고 열정도 많으신 보기 드물게 훌륭한 교수님이시지만, 어떤 사람이 한국에서 메이저 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또 미국에 나온 한국 유학생, 혹은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시는 한국 분들은 사실 대부분 한국에서 메이저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나는 한국에서 한 번도 내가 주류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실지로 주류가 되었던 적도 없다. 일단 나는 여자이고, 부유한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라, 20대부터 부모님을 부양해야 해서 학원강사가 되었고, 이혼을 했고, 장애인 아이가 있다. 그리고 그다지 날씬한 것도 아니라서, 출산 전에는 백화점의 매우 소수의 브랜드의 옷은 사이즈가 맞았지만, 출산 후에는 백화점에서 파는 옷은 들어가지도 않아서, 옷은 늘 미국에서 직구해서 입었다. 어느 모로 보나 나는 주류의 측에는 들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보다는 예술가적인 삶을 늘 동경해서, 오히려 메이저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바이런의 Child Harold’s Pilgrimage에 나오는 바이런의 히어로처럼 주변부를 배회하는 방랑자의 삶이 내게 더 어울리는 모습이고,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던 철없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내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도 일반 사람보다는 조금은 쉽지 않았나 생각한다. 내 삶도 늘 전형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무엇인가 전형적이지 않은 것이 한 가지 더 늘어난다고 해서 그렇게 놀라울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의 이러한 태도는 매우 특이한 것이고, 대부분의 부모들은 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드러내지 않는 경우도 많고, 또 심한 경우는 전에 만나던 친구들 조차 잘 만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약 25년 전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만 해도, 한국사회는 훨씬 획일화를 강요하던 사회였다. 20대에는 그러한 획일화가 너무 싫어서 외국에서 사는 꿈도 많이 꾸었다. 20대 초반에 교환학생 1년, 또 대학원 짧게 1년을 미국에서 보냈을 때는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아무도 이래라저래라 지적질을 하지 않으니 정말 살 것 같았다. 한국이던 미국이던 어차피 주변인으로 살 것이라면, 지적질당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 더 편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미국으로 유학 오는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이러한 나의 “외국은 훨씬 다양성 존중”이라는 사고가 어느 정도 깔려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자꾸 나의 아이를 정상처럼 고치려 드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 나의 아이의 독특함과 괴상함을 포용하는 방법을 좀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막상 미국에 와서 4년 정도 생활을 하다 보니, 세상 어디나 사회적으로 규정짓는 잣대를 어느 정도 강요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젊은 시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사회가 다양성을 그렇게 존중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나에게 철저히 무관심했기 때문이라는 쪽으로 요즘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사실 미국에서는 내가 백인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규범(social norm)을 적용한다는 것이 애당초 의미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대학원에 와서도 특수 교육, 혹은 장애학 (Disability Studies)에서 자폐를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는 학파를 찾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마저도 한 교수님이 은퇴하시고, 또 다른 교수님이 다른 학교로 가신 덕에, 비교적 젊은 교수님이 새로 우리 과에 오셔서 알게 된 것이지, 이 교수님이 오지 않으셨으면 아마 나는 아직도, 자폐를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는 Neurodiversity의 관점을 찾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면에 있어서 주류로의 특권을 누리는 부모였다면, 장애를 가진 자녀로 인해 이러한 특권이 박탈되는 것이 납득하기도 견디기도 어려울 것이고, 주변인으로서의 삶이 힘들었던 부모라도, 자녀마저도 장애를 가진 것에 더욱 절망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국도 자폐의 “치료”를 반대하고 자폐를 있는 그대로의 다름으로 받아들이려는 Neurodiversity 운동에 대해 반발하는 부모들이 매우 많다. 아직도 예일이나 스탠퍼드 같이 힘 있는 학교의 병원은 자폐의 유전적 원인을 찾는데 엄청난 재정을 쓰고 있고, 이러한 방향의 리서치는 자식의 자폐가 치료되어 정상과 같아지기를 염원하는 부모들의 막대한 후원을 통해서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쓰일 글들에 이러한 “치료”를 위한 유전자 연구를 반대하는 나의 관점을 보다 논리적으로 써 보려고 하지만, 공부를 하기 전에도 내가 한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40년 정도 살아 보니, 사람은 생긴 대로 사는 것이 최고라는 것. 노력해서 바꿀 수는 있지만, 본질은 사실 변하지 않는다는 것.
누가 그런 얘기를 했다. 강 상류의 돌이 하류로 내려오면 둥글둥글 마모가 되기는 하지만 원래 그 돌의 특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나도 몇 번은 남들이 좋다는 걸 시도해 보았지만, 잘 되지도 않았고 내가 행복하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남들은 다 좋다는 대학 교수도, 내가 대학원에 와서 대학 교수를 보니, 만약 내가 대학 교수가 되어서 대학에 남게 되면, 나는 3년 이내로 암 걸려서 그만둘 것만 같았다. 학교라는 조직은 내가 봤을 때는 너무 효율성도 없고, 느리고, 그다지 공정하지도 않고, 다이내믹한 재미도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관점이고 대학과 같은 기관의 안정성을 사랑하는 다른 취향도 나는 분명히 존중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아이가 정상 아이처럼 보이기 위한 노력으로 그의 소중한 인생을 보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본인이 행복한 대로 매 순간순간을 느끼면서 살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나도 가장 나 답게 인생을 살 때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나 다운 게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사회가 아무리 나를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려고 해도 내 고집대로 살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나는 나의 아이도 남 눈치 보지 말고 본인 행복한 대로 살기를 바란다. 비주류 일 수밖에 없는 삶이지만, 그래도 본인 맘은 편하게 살도록 내 힘닿는 대로 도와주고 싶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노력하지 않고 살아도 되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노력의 양보다 방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기준에 맞추기 위한 노력이냐, 아니면 더 내 주장을 하기 위한 노력이냐. 내 아이의 주장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그 주장대로 살도록 엄청 부추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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