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엄마의 미국 유학 일기
‘이 학교는 왜 시간표를 안 줄까?’
처음에는 학교에 왔다 갔다만 잘해도 하나 걱정이 없을 것 같더니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궁금한 것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학교의 중요한 행사는 보통 금요일마다 가정통신문을 넣어서 보내주는 Friday folder이나 학부모를 위한 앱인 Parent Square에 올라오곤 했는데 학교를 몇 개월을 보내도 시간표를 알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을 때는 매달 시간표와 함께 필요한 준비물이 적혀있는 종이를 받곤 했는데, 미국은 일단 별로 준비물을 갖고 오라는 말이 없기도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시간표는 가방에서도, 폴더에서도, 앱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물어보면 되는 일이긴 했는데, 한국에서는 늘 때 되면 받는 것이 시간표였기 때문에 이걸 물어봐야 준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4월 중순쯤 며칠 째 계속 새로 사 입은 티셔츠에 구멍을 내 오는 아이의 하루가 궁금하던 어느 날, 내가 대학원에서 듣는 한 수업에서 우리는 음악, 미술, 체육 외에 더 학습과 연관된 리딩이나 수학, 과학 과목의 통합 수업을 늘려야 하며, 가능하면 정말로 완전한 통합 교육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던 나는 특수 교육을 전공하는 엄마가 되어서 이렇게 무관심하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학교에 개별적인 IEP 미팅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실 학기 중에 원하면 언제든지 IEP 미팅을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부모도 많지 않지만, 학부모가 IEP 미팅을 요청할 경우 학교는 무조건 그 미팅에 응해야 하는 것이 법이라는 사실을 아는 부도도 많지 않다. 이 IEP 미팅에는 내 아이의 일반 반 선생님, 특수교육 선생님이었던 베스, 켈로그 스쿨의 자폐 프로그램 담당자인 로빈이 참석했는데, 그 날 로빈의 반응을 보며, 나는 두 번 다시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어쭙잖은 시도를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확실하게 배웠다. 세상 어디나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그 IEP 미팅에서 내가 요청한 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내 아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도록 시간표를 알려달라는 것이었고 그다음은 과학 수업 같은 교과목 수업에도 내 아이가 일반 반 수업에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내 요구에 대해 로빈은 단호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많은 통합 수업이라니요?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더 하란 말인가요? 우리는 상윤이가 일반반에 들어가서 앉아있겠다고 하는 것을 절대 억지로 끌고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상윤이가 하는 것은 mainstream이지 inclusion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여기서 mainstream 이란 장애가 없는 친구들 옆에 신체적으로 앉아있기는 하지만 같은 교과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inclusion은 같은 공간 안에 있을 뿐 아니라 함께 의미 있는 학습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빈은 내 아이의 학력 격차를 지적하는 의미로 mainstream을 강조한 것이었다.
내가 겪은 로빈은 절대 나쁜 사람은 아니다. 로빈은 지금도 어디서 나와 내 아이를 만나도 기쁘게 인사해 주고, 내 아이를 정말로 칭찬해 주고, 또 자폐 아이들에 대한 경험이 많은 보기 드물게 능력이 있는 선생님이다. 그러나 학부모의 요구가 district나 교사들의 업무 방향과 상충될 경우에는 본인의 직업과 직장을 보호하기 위해 매우 공격적이 될 수 있는 보통 직장인이라는 것을 그 날 확인하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더 공격적으로 이 상황을 밀어붙일 것인지 아니면,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갈지를 결정해야 했는데, 사실 학생이자 외국인으로 미국에 살면서 돈도 배경도 없는 내가 그들과 맞서 싸워서 이득을 볼 것이 없다는 자각을 하며 그냥 시간표만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3학년 일반 반 선생님이 보기 드물게 좋은 분이어서, 친구들이 내 아이를 조금 더 도와주도록 해 보겠다고 나를 다독여 주시고 미팅은 끝이 났다.
다음 날 베스는 바로 시간표를 전달해 주었고 내 아이의 3학년이 끝날 때쯤 나는 내 아이의 체육 수업이 언제인지, 언어 수업은 언제 하는지, 미술 수업은 언제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3학년 때뿐만 아니라 그다음 학년에도 시간표는 꼭 요구해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었고, 이해는 안 되지만 새 학년이 시작되고 시간표를 요구하면, 완성된 시간표를 받는 데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백 번 이해를 해 보려고 노력을 해서, 언어 수업, 작업 치료, 대근육 운동치료 등이 다양하게 포함된 장애 아이들의 시간표를 완전히 조정하는 것은 시간이 좀 걸리나 보다 생각해 보지만, 학교를 간 첫날부터 아이들은 무엇인가를 할 것이고, 그렇다면은 임시 시간표를 주고 그다음에 확정된 시간표를 주는 것이 상식적인 절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한국이라면 응당 이렇게 할 것이다).
2년쯤 후에 대학원 과제로 간단하게 만든 나의 설문에 의하면 3-6학년 특수 학급 학부모 중 시간표를 갖고 있는 부모는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이 부모들이 학교 선생님과 의사소통하기를 가장 원하는 부분은 그냥 내 아이가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가 하는 것이었다.
시간표는 아주 작은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특수학급에서 일어나는 일을 투명하게 내 보이려고 하지 않는 학교 혹은 district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시간표를 보면 그 아이가 몇 시간을 일반학급에서 보내고 몇 시간을 특수학급에서 보내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백 퍼센트 통합 수업이 허구라는 것을 기록해서 보여 주는 하나의 문서인 것이다. 대부분의 학부모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어느 학부모가 이를 법률적으로 따진다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학교는 웬만하면 시간표의 노출을 꺼려한다.
4학년 때 특수학급의 선생님이 바뀌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는데 모르는 사람이 교실에 있고 이전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공식적으로 연락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오늘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시고 새로운 에이드가 왔나 보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국 선생님 본인이 새로 일하게 된 누구라며 본인 소개를 하시고, 바뀐 연락처 같은 것은 내가 직접 학교에 문의를 해야 했다. 역시나 6학년 때 선생님이 그만두셨을 때도 학교나 district에서는 공식적인 연락을 준 적이 없다.
한국적 마인드를 가진 나는, 학년의 중간에 선생님이 바뀌었는데 학교에서 정식적인 공문 한번, 문자 한번, 아니면 이메일 한 번을 보내주는 일이 없는지가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은 지금도 이해되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 district를 맡고 있는 담당자 (superintendent) 마가렛이 너무 유난한 사람이라 모든 일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늘 쉬쉬하고 넘기고 있구나 하는 정도만 생각하고 있다.
의외로 한국 사회가 매우 투명한 구석이 많다. 여기서 보면 가끔 한국은 너무 투명해서 피곤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잘잘못을 따지는 사람들도 항의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미국은 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라고 배우기는 하는데, 의외로 권위 앞에 매우 순종적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많은 일이 조용히 묵인되고 처리될 때가 많아 이제는 일단은 물어보는 습관을 가지려고 하는 중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투명하지 않던 학교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정말 학교 선생님들의 수업을 모두 다 참관할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 수업은 학생, 학부모, 선생님 모두에게 정말 너무나 고생스럽지만, 학교는 학부모에게 전에 없던 노출을 하게 되었다. 내 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지금 이 시기에도 학부모에게 무엇인가를 감추려고 애쓰고 있을까. 조금은 궁금하기도 하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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