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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Nov 05. 2023

페레 고개 넘어 스위스 땅에 이르던 날

투르 드 몽블랑


1.


페레 고개 넘어 스위스 땅으로 내려서던 날은 보슬비가 솔솔 내렸다. 늘 그렇듯 그날의 목적지 숙소 가까이 도착했을 때의 마음은, 오랜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와 대문 앞에 잠시 멈췄을 때의 그것과 같다. 난생처음 밟아보는 스위스 땅의 첫 마을 라폴리는 볼수록 포 근 하고 정겨웠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슈퍼마켓에 반가워하며 안 박사는 촐랑촐랑 들어가 사과 네 개와 토마토 네 개를 샀다. 내가 산 아이스크림 두 개를 가게 앞 나무의자에 앉아 둘이서 맛있게 핥아먹었다. 그때의 우리 둘의 몸과 마음의 상태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그런 것이리라.


가게의 라디오 스피커에서는 테리 잭스의 '시즌스 인 더 썬(Seasons In The Sun)'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소년이 친구와 아빠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들이 너무나 애잔하게 심금을 울렸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어서도 혼자 맘속으로 흥얼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호반도시 샹페의 숙소에서는 잔뜩 밀린 빨래를 마친 후 흡족한 기분으로 텅 빈 식당에 혼자 앉아 있었다. 라디오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음악들 중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워터 오브 러브'가 유독 귀에 들어왔다. 노랫말은 전혀 모르면서도 그 옛날 이곡을 많이 들었던 시절, 마크 노플러의 기타음을 한창 좋아했던 그 시절 의 내 주변 정황들과 친구들 그리고 나의 사춘기 생각들이 떠올랐다. 노래는 끝났지만 내 소싯적 기억들은 잠자리까지 이어졌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는 그런 것 같다. 동네 뒷산을 걸어도, 집안 침대에 누워 있어도 나름대로의 생각은 있는 거지만 멀리 떠나 와 있으면 우리의 뇌가 조금은 더 말랑말랑해져서 주변의 사소한 자극에도 마음의 문이 열리고 상상은 더 깊어지는 것 같다. 평소에 는 그냥 흘려들었을 옛 노래 두 곡에 쉬이 마음을 빼앗기고 잠자리까지 이어지는 걸 보면 그렇다.



2


산티아고 순례길로 손잡고 함께 떠난 부부가 귀국할 때는 각자 다른 비행기로 돌아온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에서 출발 때의 좋은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기란 생각처럼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의 코스와 일정, 숙박 등에 대한 모든 계획과 진행을 나는 안 박사에게 일임했고 그가 모든 걸 리드했다. 10년 차 직장 선배를 친구처럼 대하거나 때론 제대 말년 병장처럼 모셔야 했고, 외국 인들과의 저녁자리에선 통역을 해줘야 했고, 점심 신라면 끓일 때는 경륜 있는 셰프의 손맛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일인다역으로서 안 박사의 리더 역할이 만만치 않았을 터이다.


하긴, 리더 혼자 잘한다고 팀이 잘 되는 건 아니다. 괜찮은 조수가 손발을 잘 맞춰줘야 팀 성과가 극대화된다. 나는 유능한 리더를 만나 행복했고 안 박사는 군소리 없이 잘 따르는 조수를 만나 신나게 역량 발휘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특별히 팀워크가 잘 맞는 스타일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역시 TMB라는 알프스 환경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나를 돌아보게 하는 힘, 나 아닌 바깥세상에도 관대하 게 좀 더 호의를 갖도록 만들어주는 힘, 몽블랑을 걷는 동안의 알프 스 환경은 분명 그런 보이지 않는 힘을 안겨주는 뭔가가 있었다.


3


"우와~ 행복하네요."

첫날 트리코 고개 위 설산 앞에서 땀을 닦아내며 안 박사가 내지른 말이다. 이후 마지막 날 브레방 도착 때까지 열흘 동안 매일 한두 번씩은 그가 습관처럼 질러댄 말이기도 하다. 동네 뒷산의 새벽 산책길에도 행복은 있고, 늘 곁에 있는 이와 습관처럼 밥 한 끼를 먹어도 행복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이를 자각하는 건 그다지 쉽지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걸 먹고, 내가 좋아하는 걸 보고, 내가 좋아하는 곳을 가고,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게 곧 행복이라는 것쯤은 모두가 다 안다. 그리 살 수만은 없다는 것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이 무얼 좋아하고, 무슨 일을 할 때 더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덜 아는 것 같다. 몽블랑은 내가 덜 알고 있던 것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 곳이다. 소소하지만 가치 있는 것들을 비로소 확인하면서, 수만 년 전에 살았던 한 원시인과 함께한 시간들이기도 했다. 

(아래는 김탁환 작가 글 인용)


고인돌에 새긴 별자리를 아낀다.

우주를 느끼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성능 좋은 천체 망원경이 없더라도,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맨 눈으로 밤하늘을 우러렀고 반짝이는

별들을 돌판에 새겼다.

나는 고인돌에 파인 검은 점들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묻곤 했다.

"왜 이 원시인은 밤하늘의 별을 고인돌로 옮겼을까?

어디서 태어났고 누구를 사랑했으며 무슨 일을 겪은 후에 제일 슬펐고 또 언제 가장 행복했을까."

다른 질문들은 선뜻 답하기 어렵지만, 마지막 질문엔 내가 그인 듯 속삭이곤 했다.

"밤하늘의 별들을 정확히 고인돌에 새길 때 저는 행복합니다." 

'정확히'란 단어에 힘을 준다.

각 별의 크기는 물론이고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이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숙였을까?

(2014년 한국일보 '문화산책' 칼럼 김탁환 작가 글 中에서)



https://blog.naver.com/noodles819/220805816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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