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철 Oct 31. 2023

고향집이 일궈준 내 마음속 작은 숲 '리틀 포레스트'


    온 세상이 하얗던 겨울날, 흰 눈 사각사각 밟으며 집으로 왔다. 읍내 역에 내려 집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버스는 하루 몇 번 없고, 취업도 못한 백수 주제에 콜택시는 사치였다. 간간히 만나는 길 옆 나무숲은 여전히 울창했고, 시원하게 펼쳐진 논밭길, 철길, 천변길 다 예전 그대로였다. 

    마당 넓은 시골 외딴집은 지난 방학 때 잠시 다녀간 흔적 그대로다. 창고에 남아있던 땔감으로 난로에 불 붙이니, 얼었던 몸이 금세 사르르 녹는다. 마루와 방 먼지 대충 걷어내고 재래식 난로 앞에 주저앉았다.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에 닿은 기분이다. 

    나른하게 졸려오지만 배에서 꼬르륵 신호를 보내온다. 열차 타기 전 편의점 김밥 하나 먹은 게 오늘 끼니 전부다. 아점으로 점심 거르는 일상이야 다반사라 익숙했지만 오늘은 다르다. 달동네 자취집에서 짐 싸 들고 출발해 서울역 거쳐 지금까지 긴긴 하루였다. 

    어두워진 뒤뜰에 나가 양배추 한 포기와 파 한쪽을 찾아냈다. 눈밭 속에서 눈 알갱이 흠뻑 묻히고 나온 배춧잎은 아삭아삭 싱싱했다. 좀 전에 안친 돌솥에선, 쌀독 바닥을 박박 긁어낸 쌀 한 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분 좋게 부풀어 오르고 있다. 밥 한 공기는 넉넉하겠다. 냄비 속에선 배추 듬뿍에 파 몇 조각 들어간 된장국이 보글보글 끓는다. 

    밥 한 톨,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싹 비우고 큰 대자로 드러누웠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진다. 서울에 있었으면 바람 들어오는 2층 자취방에서 인스턴트식품으로 저녁 때우고 있을 시간이다. 천국이 따로 없다. 온몸이 나른하게 녹아든다. 엄마가 다녀간 흔적이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역시나 집에 오길 잘했다. 


-- 「여행과 영화」 p.28~29



    ‘우리 혜원이도 곧 대학생이 되어 이곳을 떠나겠지? 이제 엄마도 이곳을 떠나서 아빠와의 결혼으로 포기했던 일들을 시도해보고 싶어. 실패할 수도 있고, 또 너무 늦은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있지만 엄마는 이제 이 대문을 걸어 나가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갈 거야. 

    모든 것은 타이밍이라고 엄마가 늘 말했었지?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아. 아빠가 영영 떠난 후에도 엄마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너를 이곳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고 싶어서였어.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지금 우리 두 사람, 잘 돌아오기 위한 긴 여행의 출발선에 서 있다고 생각하자.’ 


-- 「여행과 영화」 p.33






작가의 이전글 여행과 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