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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Oct 29. 2023

여행과 영화

우리는 다른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


한 달 넘겨 남미 여행을 마친 귀국 비행기에서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를 다시 보았다. 영화 속 장국영과 양조위가 어긋나던 탱고 카페 바 수르(Bar Sur) 장면에서 리플레이 버튼이 자꾸 눌러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우리가 몇 시간 머물렀던 카페 토르토니(Café Tortoni)와는 2km도 안 되는 거리였다. 오래전 극장에서 만났던 영화 속 풍경들은 왜 하필 아르헨티나 현지를 떠나고 나서야 한발 늦게 기억에 떠오른 걸까?


이과수 폭포가 2분 넘게 등장하는 피날레 장면에선 같은 폭포가 배경인 〈미션〉의 엔딩 자막을 떠올리자 우울한 분위기에 다소간 희망이 섞여 들었다.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이 있다. 어둠은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두 작품 모두 밝지 않은 결말이지만 새로운 시작이 엿보이는 것이다.


동해안을 오래 걷던 어느 날은 고성 화진포 해변을 거닐며 이곳에서 외롭게 살다 간 중국 여인 ‘파이란’을 생각했다. 바로 이어진 대진항에선 삼류 건달 강재가 담배 한 대 피우려다 말고 혼자 꺼이꺼이 울어대던 모습을 떠올리며 방파제에 오래 앉아 있었다. 부산 오륙도 앞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진 해파랑길 50개 코스 중 막바지 49코스에서의 추억이다.


여행이란 혼자 하거나 함께하는 경우가 전부는 아니다. ‘스크린 속 누군가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공간 이동은 없지만 시공을 초월한다. 가성비도 월등하고 반복 여행도 쉽다.


산드라 블록 주연의 〈그래비티〉를 극장 개봉관에서 봤을 때는 아름답고 스펙터클한 아이맥스 영상에 홀려 90분 시간이 찰나처럼 흘렀다. 얼마 후 집에서 혼자 노트북 모니터로 다시 봤을 때는 우주여행에서 만난 역동적 재난 상황보다는 주인공 라이언 박사의 상처받은 내면에 동질화되어 보는 내내 눈물이 났다. 하늘나라 딸에게 ‘엄마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전해주세요’라던 박사의 읊조림도 심금을 울렸다.


지난 10여 년 나와 여행을 함께했던 영화 50편을 세 개의 카테고리로 묶어 한데 모아봤다. 1부 ‘그곳에 가고 싶다’에는 영화 속 배경지나 여행 경로를 강조하고 싶은 작품들, 2부 ‘인생은 아름다워’에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나 감정 또는 삶과 인생이 녹아 있는 작품들. 그리고 3부 ‘세상의 로드무비’에는 일반적으로 로드무비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을 한데 모았다. 편의상 세 부류로 나누긴 했지만 구분이 애매한 경우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직관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외딴섬 모래사막에서 여행을 시작하는 영화 〈가을로〉에서, 하늘나라 민주는 홀로 남겨진 현우에게 이렇게 다독인다.

‘사막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하는 게 이상하다고? 그럼 이런 주문을 한 번 외워 보는 건 어떨까? '지금 우리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하지만 이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우리 마음속에 나무숲이 가득할 것이다.’‘


남해 우이도의 오프닝 장면에서 몹시도 어두웠던 현우의 표정은 담양 메타세쿼이아길 엔딩 장면에선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사막처럼 황량했던 그의 마음속에 어느새 울창한 나무숲이 들어차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시간 동안 영화 속 인물들을 따라가며 함께 여행한 관객들 내면에도 작은 나무 몇 그루쯤은 소담스럽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영화와 함께 떠나는 여행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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