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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Jul 28. 2024

제주 다크투어 (4) 섯알오름 예비검속


‘세계 다크투어’라는 교양 프로그램이 작년 초까지 JTBC 전파를 탄 적이 있다. 아름다운 경관을 찾아가는 단순 여행보다는 역사적 의미가 담긴 여행지를 선호하는 이들에게 특히 인기를 끌었다. 9.11 테러, 난징 대학살, 보스니아 내전 등 충격적이고 아픈 역사의 현장들을 매주 찾아가는 총 33회 이야기에는 국내는 유일하게 우리 제주만 포함돼 있다. 2022년 8월 광복 77주년 특집으로 방영된 제10회는 제주올레 10코스의 알뜨르 비행장 등 제주 섬 곳곳에 있는 일본군 진지들에 대한 이야기다. 


SNS 이웃이나 사회 지인들로부터 제주올레 처음 걸러보려 하는데 좋은 코스를 추천해 달라는 요구를 가끔 받는다. 가려는 분의 상황에 따라 달리 추천해 드리지만 어떤 경우든 10코스만큼은 꼭 포함을 시킨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경관 자체가 가장 우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송악산과 산방산의 산세가 이역(異域) 땅을 연상시키듯 아름답고, 화순에서 사계를 지나 모슬포항까지 멋진 해안선이 이어진다. 형제섬이 가까웠다 멀어지면서 계속 그 자태를 바꿔 간다. 가까이는 가파도, 멀리는 마라도까지 눈앞에 수려하다. 


둘째 이유는 올레 10코스가 제주의 아픈 역사를 가장 잘 대변하는 다크투어(Dark Tour) 최적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주 4.3 사건의 역사는 1947년 3.1절 발포부터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령 해제 때까지로 볼 수 있다. 7년 6개월이 넘는 길고도 무참한 세월이었다. 학살이 집중된 기간은 두 번에 걸친 1년 4개월 동안이다. 1948년 4월 3일 무장대가 봉기해 이듬해 여름,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되기까지 1년 2개월이 1차 기간이고, 1950년 6.25 발발 직후 예비검속이 이뤄졌던 두 달 동안이 2차 기간이다.  


‘예비검속(豫備檢束)’이란 말은 일제강점기에 많이 쓰였던 용어다. 범죄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미리 구금해 버린다는 의미로, 일제가 법률로까지 만들어 우리 국민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명이 높았던 용어다. 특히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나서 일제는, 조선의 수많은 항일 인사들을 예비검속 명목으로 수감한 바 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이번엔 대한민국 정부가 예비검속 회오리를 휘몰아왔다. 전국적으로 30여만 명이 수감되었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온 위급 상황에서 정부로서는 남한 내부에서의 소위 ‘빨갱이’들의 동조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을 수도 있다. 제주는 가장 위험한 적색경보 지역으로 여겼다.


4.3의 광풍이 어느 정도 수그러든 지 만 1년이 지나던 제주 섬에는 또다시 피바람이 몰아쳤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과 같음을 이미 생생하게 경험했던 섬사람들은 지난 1년간 숨소리조차 못 내고 쥐 죽은 듯 살아왔었다. 다시 조마조마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게 된 제주 섬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38선 이남을 휩쓸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맞서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눈앞에 닥친 죽음의 공포를 얼른 벗어나고자 우선은 멀리 떨어진 죽음의 전장으로 향한 것이다. 자신이나 부모 형제가 결코 ‘빨갱이’가 아님을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증명해 보여줘야 했다. 해병대 3천 명을 포함하여 제주 청년 1만여 명이 그런 심정으로 6.25에 자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 등 최전선에서 싸웠다. 


섬 전체에 대한 예비검속은 6.25 발발 한 달 후부터 가차 없이 이뤄졌다. 좌익운동에 간여했다는 혐의로 섬사람들 8백여 명이 한 달을 전후하여 검속 되었고, 그중 대다수가 어딘가로 끌려가 집단적으로 학살되었다. 올레 10코스 종반부에 있는 섯알오름은 대표적 학살터로 악명이 높다. 당시 이곳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만 344명이 예비검속되었고, 그들 중 252명이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것이다. 8월 20일 새벽 두 시엔 한림지역 검속자들 63명이 끌려와 총살되었고, 이어서 두어 시간 후에는 대정지역에서 끌려온 190여 명이 이곳에서 총살되어 암매장되었다. 


북한군에 밀려 대한민국 수도를 부산으로 옮긴 이틀 뒤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당국은 시신 수습도 철저히 막았다. 유족들은 분노에 떨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숨죽여 살다가 6년이 지난 1956년이 되어서야 이미 형체가 거의 없어진 유골들이나마 공동으로 수습할 수 있었다. 


한림지역 희생자들 63명의 시신은 다행히 거의 신원확인이 되어 한림읍 명월에 있는 ‘만벵듸 공동장지’에 합동 이장되었다. 대정지역 희생자 시신들은 워낙 많이 훼손되어 신원확인이 불가능했다. 누가 누군지 모르는 시신들의 뼛조각을 추려 132구의 시신을 인근에 안장했다. 유족들은 이 묘역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 이름 지었다. 


‘백여 할아버지 자손의 뼈가 엉켜 하나가 되었다’ 또는 ‘자손 한 사람 한 사람은 여기 함께 묻힌 백여 선조들을 다 자신의 조상으로 모신다’는 의미겠다. 올레 10코스 중간 지점에서 직선거리 1km 떨어진 위치에 백수십여 개의 야트막한 묘들이 나란히 열 지어 누워 있다. 


아름다운 길 이면에 어두운 역사의 아픔이 묻혀 있는 것이다. 멀지 않은 옛날에 섬사람들이 흘리고 쏟아냈던 피와 땀과 눈물과 한숨이 올레길 주변 곳곳에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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