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몸과 마음의 상처란 결국은 아물게 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대개는 조금씩이라도 자연치유가 된다. 세월이 가면서 상처 자체가 잊히기도 한다. 한번 겪었던 어떤 아픔을 평생 느끼며 살 필요는 없도록 해주는 조물주의 배려인 것이다. 치유되지도 않고 잊히지도 않아서 조물주도 어쩌지 못하는 예외인 경우도 있다.
‘진아영’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할머니의 경우가 그랬다. 젊었을 땐 이름만큼 얼굴도 고왔고 아름다웠다. 그랬던 옛 시절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턱을 잃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아래턱 전체가 날아간 것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의 표현에 의하면 ‘불행하게도’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리곤 계속 살았다. 약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시간들을 무려 55년이나 살아냈다. 그리곤 2004년 9월에 비로소 세상과 이별했다. 향년 90세, 결혼도 한 바 없고 자식도 없었다. 늘 혼자였다. 턱이 없는 흉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늘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살았다. 생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겐 ‘무명천 할머니’로 불린다.
1949년 1월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지 5개월째 접어든 때였다. 4.3 사건이 일어난 지는 벌써 10개월째, 제주 섬에는 연일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신생 정부가 막 펼치기 시작한 ‘초토화 작전’이란 실로 무시무시했다. ‘섬의 해안가에서 벗어난 모든 중산간마을 사람들은 무조건 해안 쪽으로 다 내려와라, 안 그러면 누구든 이유불문 사살한다’는 포고문이 엄포가 아니었다.
제주 섬의 북서쪽에 위치한 한경면 판포마을에도 1월 어느 날 무서운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추운 겨울밤 고요했던 마을은 단번에 아수라로 변했다.
“아영아!”
“… …”
“아무 디나 곱으라 혼저!”
아무 데나 빨리 숨으라는 아버지 목소리는 낮았지만 다급했다. 딸도 반사적으로 집 밖으로 뛰쳐나왔고 어둠 속을 뛰었다.
“다 죽여!”
토벌대의 고함과 총소리와 사람들 비명들이 요란하게 뒤섞였다. 어느 순간 어딘가에서 큼직한 쇠망치가 날아와 얼굴을 후려치는 듯했다. 정신없이 뜀박질하던 몸이 일순 옆으로 휘청이더니 그대로 꼬꾸라졌다. 몸을 돌려 누우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으나 얼굴 반쪽이 없어진 듯 이상했다. 붉게 타오르는 밤하늘에서 끈적한 액체가 콸콸 쏟아지고 있다는 생각, 온몸이 불구덩이에 빠졌다는 생각을 하며 아영은 정신을 잃었다.
당시 그녀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며칠인지 몇 달인지 모를 시간이 흘러 비로소 의식이 돌아왔을 때, 자신은 얼굴 전체가 헝겊에 싸여 집안 방에 누워 있었다.
“총알이 턱에 맞으난 목심이라도 살아났쑤게. 호썰만 비켜시믄 가심이나 머리에 맞아실 거 아니우꽈.”
“경허영 죽어버려시믄 차라리 좋아실 건디. 정 살아 이성 어떵 헐 거라. 큰 일잉게.”
방문 앞마루에 걸터앉은 친지들의 말소리도 들려왔다.
병원 치료 따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질긴 목숨과 함께 오랜 세월은 흘렀고 의지해왔던 부모님까지 세상을 떠나자 고향마을에선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망가진 몸을 하루하루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옆 월령 마을에 시집가 살던 친언니가 혼자 남은 동생을 데려갔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이다. 언니와 조카의 보살핌이 있었다지만 혼자 견뎌내야 했던 시간의 아픔들은 본인 외에는 실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턱 전체가 없어졌으니 밥을 제대로 씹을 수도 없었고 따라서 소화기관도 늘 원활치 못했다. 늘 진통제와 약에 의지하는 일상이었다. 제대로 된 말을 할 수가 없었으니 주변과의 의사소통도 원활치 않았다. 친 혈육이던 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60대 후반이 된 진아영 할머니 혼자 세상에 남겨졌다. 언니의 자식인 외조카가 일상사에 도움이 되는 유일한 끈이었다.
생계뿐 아니라 매일매일 복용하는 약값을 벌기 위해서 할머니는 뭔가라도 늘 해야 했다. 바닷가에 나가 톳을 캐다 팔기도 하고 이웃집 날품팔이 일은 언제든 무엇이든 했다. 늘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고, 턱없는 얼굴을 남에게 보이는 일은 없었다. 혹여 마을 친지 제삿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어도 반드시 구석에서 벽을 보고 돌아앉아 혼자서만 먹었다. 아랫니가 없어 제대로 씹을 수도 없었으니 집에서의 식사는 대개는 죽으로 때웠다.
할머니가 살았던 월령마을은 밭과 들이 온통 선인장으로 뒤덮였다. 앞바다에는 거대한 풍력발전기들이 하나씩 또는 떼를 이뤄 묵직하게 돌아간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이라 언제부턴가 외지인 여행자들엔 핫 플레이스가 되어 있다. 마을 골목길을 누비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무명천 할머니 삶터’ 이정표와 만나고, 녹색 지붕이 아담한 진아영 할머니 집에 이른다. 할머니가 노후를 살았던 안식터이다. 젊었을 때 모습을 포함한 여러 장의 사진들, 침구류, 약봉지들, 바느질 도구, 옷가지들, 냄비 등 주방도구들이 생전 당시처럼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다녀간 이들이 할머니 드시라고 놓고 간 초코파이와 과자 등 간식들도 보였다. 물론 코로나 이전 시절의 풍경이다. 지금은 굳게 잠겨 있다.
할머니는 집안에 있을 때도 항상 자물쇠를 꼭꼭 걸어 잠갔고, 잠깐만 집을 비울 때도 늘 자물쇠를 잠갔다고 한다.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려 하거나, 집에 있는 걸 훔쳐가려 한다는 피해의식이 많으셨는가 보다. 턱을 잃어버리던 그날의 악몽이 반백 년 세월이 지나도 결코 잊히지 않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던 탓이리라. 국가로부터의 사과나 배상 같은 건 꿈도 꾼 적이 없었다. 평생 자신의 팔자요 개인의 불운으로만 여기며 살다 떠났다. 할머니의 죽음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4.3 관련, 국가의 책임에 대하여 대통령이 공식 사과하기에 이르렀고, 할머니의 삶은 뜻있는 이들로부터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주변에 틈틈이 선인장을 심었다. 몸 불편한 할머니가 특별히 손길을 많이 안 줘도 저들은 알아서 잘 자랐다. 저들 스스로 자라나 열매도 잘 맺었다. 선인장들은 할머니에겐 무료한 시간을 함께하는 벗이 되었고 그 열매들은 할머니 약값에 보탬이 되어주곤 하였다. 코로나 이전에는 진아영 할머니의 월령 집 마당에 사람들이 자주 모여들곤 하였다. 할머니의 아픈 삶을 돌아보며 추모하기 위해 멀리서 온 이들이다. 그럴 때면 음악인 최상돈 씨가 무명천 할머니를 기리며 만든 곡 ‘노란 선인장’이 낮게 울려 퍼지곤 하였다.
난 그 꽃을 본 적이 없었네
돌담 노랗게 핀다는 그 꽃을
꽃잎 날아 하늘 푸를 때
그제 알았네 노란 선인장
고맙다는 말 이제 드리네
살아온 세월 고맙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