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신라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오랜 세월 독립을 유지해 온 탐라국(國)은 서기 1105년에 탐라군(郡)으로 격하되며 고려에 편입된다. 평화로웠던 제주가 외지인들의 지배로 고통을 받게 되는 시작점이다. 이후 육지에선 정중부의 난으로 고려 무신정권이 시작되고, 몽골에선 칭기즈칸이 일어나 중국대륙을 통일하며 서역으로 뻗어 나간다. 동방의 한 귀퉁이 고려 땅이라고 안전할 리 없었다. 3차에 걸친 몽골의 침입으로 궁지에 몰린 최씨 무신정권이 결사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읍인 강화를 제외한 고려 땅 전역의 무방비 백성들은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유린되어 갔다.
친몽파인 고려 문신들이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이후 고려는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세운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무신정권의 잔존 세력 삼별초는 몽고와의 결사항전을 외치며 난을 일으키고, 이 사건은 육지와 멀리 떨어진 외딴섬 제주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강화도에서 밀려난 삼별초에게 제주는 그야말로 마지막 보루였다. 죽음을 각오한 이들의 결사항전을 위한 요새(항파두리 토성)와 해안 성벽(환해장성)을 쌓는 일은 모두 제주 섬사람들의 몫이었다. 이윽고 고려와 몽골 연합군 만여 명이 제주 섬에 상륙하였고, 몇 번의 교전 끝에 삼별초는 진압되고 만다. 1273년 4월의 일이다. 설문대할망이 섬을 만들고 고양부 3씨가 섬의 역사를 시작한 이래, 외부 세력에 의해 섬이 전장터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100년 후 제주 섬에 무시무시한 두 번째 사건을 잉태하게 된다.
삼별초가 토벌되자 몽골군 일부가 섬에 남으며 제주는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바뀐다. 독립국가였던 탐라가 고려에 흡수된 지 170년 만에 이젠 몽골인들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원나라에게 제주 섬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하나는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지리적으로 최적의 위치였고, 또 하나는 그들의 핵심병기인 ‘말’을 키워 공급받기에 가장 좋은 환경조건을 갖췄던 것이다.
이렇게 제주는 이후 100년간 원 제국의 14개 목마장 중 하나로 운영되며 수탈당한다. 이 기간 동안 섬에는 고려 조정에서 파견된 관료들도 많았지만, 더 상급 세력은 원 제국 소속의 말 사육 전문가들인 목호(牧胡)들이었다. 섬사람들은 고려 관료와 원나라 목호들로부터 이중의 수탈을 당해야 했다. 세월이 흐르며 원 제국도 점차 힘이 빠진다.
중국대륙엔 주원장이 나타나 몽골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명나라를 건립한다. 고려 또한 지는 해인 원나라보다는 새로운 명나라를 섬겨야 했다. 명은 제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말 2천 필을 요구해 온다. 고려 조정으로선 명의 요청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즉각 제주로 사신을 보내 명의 요청을 전한다. 100년 동안 섬을 지배해 온 원나라 목호 세력이 호락호락 이에 응할 리 없었다. 자신들의 원수인 명나라에게 말을 바칠 수 없다며 오히려 고려 조정이 보낸 사신을 죽여버린다. 이에 고려 공민왕은 최영을 사령관으로 하는 수만의 토벌대를 제주로 보낸다. 100년 전 ‘삼별초의 난’ 이래 바다 건너 제주로 또다시 피바람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당시 제주에 상주하던 몽골족 목호들은 1,700여 명에 불과했다. 최영의 토벌대는 제주 전체 인구에 거의 맞먹는 숫자였다. 고려 조정은 섬 전체가 이미 몽골인들과 한 몸, 한통속이 되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백여 년 세월 속에서 목호들은 이미 제주에 뿌리를 박으며 자연스럽게 섬사람들과 피가 섞인 것도 사실이었다.
고려군이 지금의 한림 앞바다인 명월포에 이르자 목호 기병 3천은 초반엔 승세를 잡는 듯했으나 역시 역부족이었다. 물밀듯이 상륙해 오는 토벌대에 밀리며 중산간 지역으로 그리곤 한라산 남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목호들은 토벌대의 칼날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와 지휘부는 서귀포 앞바다에 도착해 범섬으로 건너갔으나 얼마 후 모두 종말을 맞는다. 대다수는 수직으로 깎아지른 범섬 절벽으로 떨어져 자결한다. 생포된 자들도 곧바로 즉결 처형돼 버렸다.
범섬은 올레 7코스 앞바다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이 아름다운 해안 올레길을 걸으며 650년 전 이곳에서 있었던 처참했던 역사의 일들을 떠올리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법환포구는 범섬과 가까우면서 바다로 나가고 들어오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췄다. 과거에 이곳은 ‘막숙(幕宿)개’라 불렸다. 범섬으로 도주한 목호군을 진압하려 최영의 토벌군이 이곳에 막사를 치고 주둔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포구에서 7코스를 따라 10분쯤 나아가면 ‘배염줄이’ 표지석과도 만난다. 범섬과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위치다. 범섬을 포위한 고려군 전선들과는 별도로 막숙개에 주둔하던 토벌대가 뗏목과 배를 모아 쇠사슬로 잇고 이곳에서부터 범섬까지 닿는 배다리를 놓은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범섬에서의 최후가 있고 나서도 토벌대는 제주 섬을 샅샅이 뒤져 목호 잔당과 그 가족들 및 연루자들을 모조리 찾아내 처단했다.
당시 섬 하늘은 까마귀 천지였다. 들과 바다에 널린 시신들은 까마귀밥이었던 셈이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가 땅을 덮었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 당시의 참상을 묘사한 옛 기록의 문장 한 줄이 그 처절함을 말해주고 있다. 섬 인구의 거의 절반이 죽어간 사건이다. 제주의 돌들에 구멍이 숭숭 뚫린 건 그때 죽은 원혼들의 한숨 때문이라고 한다.
제주 섬 바다와 들판에 수만의 시신들이 떠다니고 나뒹굴던 즈음 45세의 공민왕 또한 급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술 취해 자는 동안 측근들에게 온몸을 난자당한 것이다. 왕의 뇌수가 사방으로 튀면서 벽에 흩뿌려질 정도로 처참한 죽음이었다고 한다. 최영 장군 또한 목호의 난 평정 14년 뒤,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의 칼날에 목을 내주며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4년 뒤인 1392년, 조선의 개국과 함께 475년 역사의 고려 운명도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