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3일 자 매일경제 신문에는 반바지 차림의 문재인 전 대통령 내외가 바다를 배경으로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한 모습이 깜짝 실렸다. 감색 커플티 등에는 '길이 사람을 움직인다'(TRAIL MOVES PEOPLE)는 영어 문장과 간세 표식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제주올레 측은 문 전 대통령이 "산티아고 순례길과의 공동 완주 인증에 큰 도움을 주셨다"며 “두 분 내외가 올레 4코스 중 표선리에서 토산리까지 7∼8㎞를 3시간가량” 걸은 사실을 밝혔다.
올레 4코스는 표선해수욕장에서 남원포구까지 이어지는 해안길이다. 올레 대부분 코스들이 15km 내외거나 그 이하 거리인데, 19km에 걸친 4코스는 상대적으로 장거리에 해당된다. 구태여 올레 안내표지를 찾을 필요도 없이 왼쪽 바다를 바라보며, 그저 해안도로만 따라가면 된다. 해안 갯가에 있는 습지인 갯늪을 지나고, 장병들의 수고를 통해 친환경적으로 조성된 ‘해병대길’도 정겹게 걷는다. 인공적이지만 깔끔하게 관리되는 듯한 ‘토산산책로’도 고즈넉하다. 하지만 4코스는 전체적으로 도드라진 특징이 없이 평이하다. 코스 후반부에선 살짝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4코스 종착지인 남원포구에 이르면 사막을 지나 오아시스에 이른 듯 주변이 역동적이고 갑자기 생기가 돌게 된다. 4코스를 마친 후에는 곧바로 5코스로 들이대지 말고 잠시 숨 고르기를 하는 것도 좋다. 600년 전에 이곳에 살았던 한 여인을 만나보는 것이다.
남원포구 입구 정류장에서 742-2번 버스를 타면 남원-한남 간 도로인 남한로를 달려 20분 안에 한남리에 도착한다. 남원포구에서 4.5km 떨어진 중산간 마을이다. 이곳 마을회관 경내에는 고려 정 씨의 열녀비가 세워져 있다. 오랜 세월 인근에 방치되다시피 했던 이 비는 2019년 10월에 이곳으로 옮겨져 새 단장을 했다. 제주 역사상 열녀로 추서 된 수십 명의 여인들 중 1호 열녀비라는 데에 의미가 크다. 올레길 이어 걷기를 잠시 멈추고 버스로 다녀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비 앞뒤에 새겨진 한자 글은 일반인의 눈에 쉽게 읽히지 않지만 바로 옆에 비문을 풀어쓴 소개 글이 있다.
‘고려 때 석곡리보개의 아내이다. 합적의 난 때 그 남편이 죽었는데 정 씨의 나이가 어린 데다 자식이 없었다. 얼굴과 자태가 고와 안무사와 군관들이 강제로 아내로 맞이하려고 하였다. 정 씨는 스스로 죽기를 맹세하면서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베려 하자 마침내 아내로 맞이하지 못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시집가지 않았다.’
비문 중 ‘합적(哈赤)의 난’은 공민왕 23년, 제주에 남아 있던 몽골인 잔당인 하치(哈赤)들이 고려 조정을 향해 일으킨 난을 말한다. 학교 교과서엔 나와 있지 않지만 제주 섬에선 4.3 사건보다도 더 처참했던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 ‘목호의 난’으로 더 알려져 있는데, ‘목호(牧胡)’는 한자 뜻 그대로 ‘말 키우는 오랑캐’를 의미한다. 합적 또는 하치도 비슷한 말이다. 목장에서 말을 사육해 키우는 데에 핵심 역량을 갖춘 몽골인들을 일컫는다.
세계 정복을 위해선 우수한 전투마들이 필수였기에 몽골로선 보다 많은 말들을 신속하게 잘 키워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때문에 이들 목호 또는 하치들은 상당한 대우를 받는 전문가 집단이었다. 이를테면 2차 대전에서 탱크나 전투기를 설계하고 양산해 내는 독일 과학자나 기술자들과 비슷한 위상이었던 셈이다.
고려 정 씨의 남편도 당시 제주에 상주하던 목호 1700여 명 중 한 명이었다. 제주 여성과 혼인하여 알콩달콩 살아가는 와중에 난이 일어났고, 목호 조직의 중간 간부였던 그로서는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고려 최영 장군이 이끄는 수만 명 토벌대를 맞아 싸우다 최후를 맞았고 결국은 자결했다. 비문에 있는 그의 이름 석곡리보개(石谷里甫介)는 일부 고문서에는 석나리보개(石那里甫介)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20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정 여인은 원래 탐라토박이는 아니었다. 고려 조정에서 오래전 유배와 살던 정한영의 손녀딸이었으니 아버지 대부터 탐라사람이 된 셈이다. 정한영은 살아생전에 목호 중 한 명인 석나리보개를 눈여겨보면서 손녀 사윗감으로 점찍어뒀는가 보다. 눈을 감기 직전 노인은 그 몽골 청년과 손녀딸을 불러, 둘이 혼인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얼마 뒤 그 유언은 지켜졌다. 비록 멀리 유배와 있었지만 고려 귀족의 일원으로서 변발 오랑캐와의 혼인은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몽골인 백호장(百戶長) 석나리보개가 노인에게 얼마나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몽골은 오랜 세월 탐라를 지배하고 있었고, 목호들은 탐라 사회의 상위 계층이었다. 조정에서 파견된 고려 관료들보다도 더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100년 전 삼별초의 난 때 여몽연합군 토벌대로 왔던 몽골군 일부가 남아 주둔하면서 탐라 섬은 기존의 고려 소속에서 원 제국 직할령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중국대륙에선 명나라가 흥하고, 탐라 목호들의 조국인 원나라는 점차 세력이 약화된다. 이를 틈타 고려 조정은 원으로부터 탐라를 되찾아오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탐라를 장악하고 있던 몽골인 목호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00년 동안 탐라에 정착해 살아온 그들이었다. 섬 여인들과 혼인하여 2대 3대 뿌리를 내리는 중이었고, 섬에는 이미 탐라-몽골 혼혈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고려 조정으로선 탐라 섬 전체가 친 몽골화돤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기에 고작 1,700명의 목호들을 척결하기 위해 섬 전체 인구에 맞먹는 대규모 토벌대를 보내게 된 것이다. 100년 전 삼별초 토벌 때보다도 두세 배 많은 대군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