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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Sep 21. 2024

제주 다크투어 (10) 고려 정 여인 부부의 1374년

목호의 난 세 번째이야

최영장군이 전함 300여 척에 고려군 2만 6천을 이끌고 지금의 옹포해안 명월포에 이른 건 1374년이다. 100년 전 여몽연합군이 항파두리 삼별초를 토벌할 당시의 두 배가 넘는 군세였다. 2,000명도 안 되는 몽골인 잔당 토벌을 위해 당시 섬 인구에 거의 맞먹는 군세를 보낸 건 이유가 있었다. 제주인들은 이미 고려의 백성이 아니라 몽골에 동화된 ‘오랑캐 집단’이라는 고려 조정의 인식 때문이었다. 제주인들은 북조선에 동화된 ‘빨갱이 집단’이라던 4.3 사건 당시의 중앙정부의 인식과 판박이였다. 

어쨌든 목호 쪽의 패배는 시간의 문제였고, 결과는 참혹했다. 정 여인의 남편 석나리보개를 포함한 목호 집단과 그 가족들은 물론 목호를 도운 자, 그리고 몽골인의 피가 섞였거나 변발을 한 자들은 모두가 죽임을 당했다. 남녀노소 가림이 없었다. 온 섬의 들과 벌판엔 시신들이 나뒹굴었고 그 위를 까마귀 떼가 시커멓게 뒤덮고 있었다. 

학교 교과서에도 언급된 바 없고 정작 오늘의 제주인들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고려 말의 이 살육 사건은, 2019년에 발간된 정용연 작가의 〈목호의 난: 1374 제주〉를 통해서 시중에 좀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제주인 아닌 육지 사람이 쓴 이 어른용 만화집에 담긴 내용을 토대로 당시 정황을 재구성해본다. 650년 전 이 섬에 살았던 제주인 부부, 버들아기 정 여인과 목호 남편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그들은 한때 몽골제국의 전사들이었다. 오랜 세월 탐라 섬 토착민들과 섞여 살며, 한라산 중산간을 몽골의 대초원인 양 말 달리던 그들을 일컬어 사람들은 오랑캐 목동, 목호라 불렀다. 변발 오랑캐인 그들이 섬에 첫발을 들였을 때 섬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은 탐학한 고려 관리보다 무서웠고 해안 지방을 노략질하는 왜구만큼이나 잔인했다. 초승달처럼 굽은 오랑캐 칼 만곡도를 휘두르며 다녔고, 동료가 죽어도 시체는 묻지도 않고 들판에 버리는 족속들이었다.

잿더미가 된 그 죽음의 땅에 풀씨가 하나 둘 날아들고 이내 푸른빛이 검은 재를 덮기 시작한다. 점령지에서의 약탈은 그들 고향인 초원의 법칙. 그들에겐 인연 또한 전리품이었으니, 아녀자들에게 씨를 뿌리곤 새로운 인연으로 부부가 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대를 이어가며 섬사람들과 하나가 되어갔다. 몽골인과 탐라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말과 함께 자랐다. 말 울음소리에 잠을 깨고, 말똥을 태워 추위를 이기고 말 젖으로 부족한 영양을 채우며 쑥쑥 커갔다. 말 털에 붙어사는 부구리를 긁어내고, 말 달리기 시합에 나가 또래 아이들과 재주를 겨루는 것이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 의례였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제 섬에선 어디를 가도 오랑캐 피가 섞인 아이들이 쉽게 눈에 띄게 되었다. 원나라 세력이 물러난 탐라 섬에 고립된 목호들 중 한 명인 백호장 석나리보개, 제주에 유배 온 고려 관리의 손녀딸이자 석나리보개의 아내 버들아기, 할아버지 정한영의 유언에 따라 맺어진 둘은 서로 너무나 사랑하며 더없이 보기 좋은 부부였다. 몽골인 목호의 아들과 고려 유배인의 손녀딸, 둘은 섬에서 태어났으니 육지사람이 아닌 섬사람들이었다.

남편 석나리보개가 목호 일터로 나갈 때 아내 버들아기는 빙떡을 도시락으로 싸줬다. 곱게 빻은 메밀가루를 미지근한 물과 섞어 반죽한 뒤 번철에 부치고, 삶은 무채에 쪽파, 참기름, 참깨 등을 넣고 버무린 뒤, 번철에 부친 전 위에 얹어 둥글게 빙빙 말아 만든 아내의 이 빙떡이 석나리보개에겐 세상 둘도 없는 최고 음식이었다. 

‘육지에서 토벌대가 온다더라’, 언젠가부터 불길한 소식들이 들려왔고 마냥 불안해하던 어느 날, 명월포 앞바다에 수백 척의 고려 전함이 당도했다. 탐라에 남아 있던 목호 세력의 열 배가 넘는 군세였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 목호의 괴멸은 시간 문제였다. 상륙한 고려군에 밀려서 남으로 달아나던 석나리보개와 목호 군은 범섬이 시원하게 보이는 해안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한다. 곧이어 이곳에서마저도 밀려난 목호들은 바다를 건너 범섬으로 퇴각하지만, 고려군은 함선 40척으로 섬을 에워쌌다. 그리곤 상륙하여 목호의 마지막 숨통을 조르기 시작한다.

범섬 사방은 천 길 낭떠러지, 결국 최후의 시간을 맞았고 석나리보개와 목호들은 절벽 끄트머리까지 밀려난다. 절벽 아래 바다로 뛰어내리던 목호들의 절규가 하나둘 잦아들면서 모든 건 끝난다. 목호 대장 석질리필사는 아들 셋과 일당 수십을 이끌고 항복해왔으나 모두 고려군에 의해 즉결 처형되고 만다. 정 여인은 몇 날 며칠 뜬눈으로 지새며 남편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빌었지만 허망한 일이었다. 남편과 부부의 연으로 살아온 길지 않은 시간은 버들아기 정 여인에게 꿈속 천국이었지만, 눈 뜬 현실은 하루하루가 무간지옥이었다.


남편이 범섬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이래 여러 해가 지났다. 젊은 과부 정 여인은 고려 관리들 여럿의 끈질긴 구혼에도 이를 모두 거절한다. 정씨의 주변 친족들도 입을 모아 재가를 권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고려 말기에 남편을 잃은 20대 정 여인은 조선왕조로 바뀌고도 30년이 지날 때까지 절개를 지키며 홀로 살다가 70대에 눈을 감는다. 

그녀가 죽고 얼마 뒤인 세종 10년(1428년), 조정에서는 열녀비를 세워 그녀의 정절을 기렸다. 한남리 마을회관에 있는 지금의 열녀비는, 그로부터 400년 뒤인 순조 24년에 제주목사 한응오가 부임 초기에 다시 세운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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